한국기독교장로회 삼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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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는 하나님께서 네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는 당신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의 가르침을 행하고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신 10:12).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그가 인간이 되느냐, 아니면 단지 인간이라는 ‘종’에 머무느냐에 대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요즘 교회들은 하나님을 ‘나를 위로해 주시는 분, 치료해 주시는 분, 인도하시는 분, 사랑하시는 분’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외경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분위기가 빈약합니다. 하나님을 내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신명기가 하나님을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시는 분, 나그네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은 그분 앞에 선 인간됨에 대한 요구입니다. 나그네와 같은 약자를 보호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별됨‘ 즉,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인간됨의 성별은 형식적인 제의(예배)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는 그것을 “마음의 할례”로 말합니다. “마음의 할례”야말로 인간이 동물의 껍질을 벗고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함이로다”(마 5:17).
“완전케 하다”는 ‘가득 채우다’ ‘완성하다’ ‘끝마치다’라는 동사입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일 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리라”고, 율법의 완결성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마태복음은 율법으로 의식화 된 유대인을 대상으로 쓴 서신입니다. 마태 자신이 유대인이기도 했습니다. 유독 마태복음에서만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를 나열한 것은, 유대인을 의식해서 그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을 옹호하신 것으로 들립니다.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율법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율법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문맥상 산상설교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들은 제자들 중 많은 이들이 이제는 율법의 요구로부터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지닌 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을 ‘멍에’로 여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 오랜 체증이 뚫리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입니다.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생명을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그 다음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위선자’ 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의로운 척하면서 뒤로는 검은 이익을 챙긴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남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 아래 살게 된 사람들은 율법주의자들보다 더 나아야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보다 더 강한 내적 윤리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인간을 보는 관점도 그러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을 그렇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보다 근원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열거한 죄악들은 인간이 어디까지 비열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법한 자 : 법을 알면서도 고의로 법을 어기는 자.
법에 복종치 않는 자 : 어떤 통제나 규칙도 받아들이지 않는 제멋대로인 자.
경건치 못한 자 : 하나님께 노골적으로 대항하는 자.
죄인 : 도덕적인 규범이나 표준이 없는 자.
거룩하지 아니한 자 : 생명에 대한 신비로움과 경외심이 없는 자.
아비를 치고 어미를 치는 자 / 살인자 /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 / 사람을 탈취하는 자 / 어린이를 유괴, 납치하는 자, 노예매매 하는 자 / 거짓말하는 자, 위증하는 자.
이 모든 행위들은 인간이 얼마나 짐승처럼, 아니 악마처럼 변할 수 있는 가를 보여 주는 죄악들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요점은 이러합니다.
인간은 본시 법이 필요 없을 만큼 선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율법이 필요한 것이다. 법이란 벌이 두려워서 지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벌이 두려워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지켜야 한다. 율법의 의무에서가 아닌 사랑의 의무에서 법을 지켜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윤리를 제시합니다. 법의 강제가 무서워 지키는 윤리가 아닌, 사랑이 동기가 된 윤리를 제시한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처럼 표면적으로는 율법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율법 이상의 양심의 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율법이 아닌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 그리고 거짓 없는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전시의 생존전략’과 같은 극열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전시의 생존전략’이라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극단적인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인간 본성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지 않을 수 없는 삶입니다. 양심이나 염치, 생명존중, 타자에 대한 배려와 같은 미덕은 ‘무슨 얼어 죽을!’ 이라며 눈앞의 생존에만 매달리는 삶입니다. 오로지 승자가 되는 것만을 성공으로 여기며, 피도 눈물도 없이 사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경제도 그렇게 해서 성취한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지금도 여전히 전시의 생존전략을 동력으로 삼고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동료 인간을 밀어뜨리며 사는 것입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을 경영하는 이들에게 위험한 작업장에서 죽어나가는 노동자는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됩니다. 최근 광주에서 일어난 신축 아파트 붕괴 사고도 알고 보면 전시의 생존전략처럼 극단의 경쟁에 내몰아서 생긴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국가와 사회가 사람들을 극도의 생존경쟁으로 떠밀면서 경제가 부흥하면 과연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전시의 생존전략과 같은 관행을 바꾸려 하니 곳곳에서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무엇보다 기득권층의 저항은 가히 저 옛날 유대인들만큼이나 철벽입니다. 기막힌 것은 공무원들까지 기업의 방패막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선포하셨을 때 극렬하게 저항했던 자들 대부분이 유대 지도층인 연유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익숙해진 관습이나 관점을 달리한다는 것은 마치 하늘을 배반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법의 금지에 앞서 개개인의 내적인 변화를 강조하신 이유가 그런 세계에 대한 자성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시의 생존전략처럼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만이 미덕은 아닙니다. 어떻게든 성공하는 것만이 미덕은 아닙니다. 국가까지 나서서 인간성을 포기해야만 살아갈 수 있도록 극도의 경쟁으로 몰아붙이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행복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삶의 경외심을 회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복음이 추구하는 행복은 나와 내 가족을 넘어서서 함께 행복한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행복은 나와 내 가족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태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