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자유(렘 23:5-8; 요일 4:15-21; 마 1:18-25)/ 2022. 12. 18.

관리자
202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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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윤석렬 대통령은 ‘자유’를 무던히 강조합니다.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합니다.
인간을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존재로 보는 게 자유의 근간입니다. 이런 자유에 대한 이해가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온 정치적 바탕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 ‘자유’가 한 나라를 바르게 작동시키는 모든 것의 답인가?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들이 그 문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예레미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 이렇게 말합니다.

(렘 23:7-8)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방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거하리라 하시니라"

우리 앞에 오실 메시아는 애굽 땅 즉 노예 생활에서 만난 하나님이 아닌,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즉 해방된 자유민으로 자기 땅에서 만나게 될 하나님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노예로 대하지 않고 자유하는 백성으로 대하신다는 것이지요. 천금 같은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예 습성을 지닌 이들은 인간으로 존중받기가 어렵습니다. 자율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은 명령하고, 지시하고, 억압하지 않으면 통치하기가 어렵다고 전제합니다. 식민지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을 통치하는 방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가 되었을 때, 인간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종과 관련시키고, 복음을 자유와 관련시킨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 또다시 율법의 멍에를 매지 말라는 게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역설한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국민을 우습게 아는 권력은 국민을 억압하고, 벌주고, 갈라치기하고, 부패시키는 것을 통치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다 결국 나라는 도탄에 빠지고, 백성들의 고통은 가중됩니다. 예레미야는 이 같은 쓰라린 경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메시아를 자기 땅에서 사는 자유민의 삶과 관련시킨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또 시선이 멈춘 곳이 있습니다. 바로 요한일서 4장 18절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쫒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살아가면서 함께해야 할 이들이 있습니다. 불가피 곁에 두어야 할 이들이 있습니다. 함께 있음으로 자랑스러운 이가 있는가 하면, 함께 있음으로 부끄러운 이가 있습니다. 같은 핏줄인데도 자랑스러운 자식도 있고, 부끄러운 자식도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자식은 드러내고 싶고, 부끄러운 자식은 감추고 싶겠지요. 또한 함께 있음으로 내게 도움이 되는 이도 있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도 있습니다.

불의의 희생자가 되어 외롭고 힘든 이들과 함께 하는 건 어떨까요. 대단한 용기와 희생이 필요합니다. 박해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데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용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요한 서신의 말씀에서 시선이 멈춘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사랑의 힘이라고. 사랑의 힘 아니고는 내 앞길에 장애가 되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박해받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요한 사도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쫒는다, 즉 두려움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박해 받는 이들과 함께 하려면 두려움보다 더 큰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 모든 두려움을 개의치 않습니다.

예수께서 보여 주신 삶이 그러합니다. 그분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신 것은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땅 비천한 이들과 함께 하신 것은 비천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워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비천한 자리에서 가난한 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사신 분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오늘날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신분의 벽이 높았습니다. 만인이 흠모할 신분으로 태어나도 세상을 통치하기 어려운 터에, 가난한 신분으로 태어나시어 멸시와 천대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분이니, 이것이야말로 지극한 사랑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아무에게서도 보호받을 수 없는 생명으로 태어났음에도 오로지 하나님 사랑의 힘으로 살았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의 권세 있는 자들과 대척점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 것은 그런 사랑의 힘을 지니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유념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랑을 감성적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사랑은 자유를 빛나게 하는 에너지로 볼 수 있습니다. 자유 없는 사랑이 참 사랑일 수 없듯이, 사랑 없는 자유는 참 자유일 수 없습니다. 자유가 아무리 소중해도 그 자유는 사랑이 있을 때 완성됩니다. 복음의 자유를 강조한 사도 바울이 유난히 사랑을 강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랑의 본질을 파악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여 스스로 지혜 있는 채 하지 말라”(롬 12:16)라고 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힘이 필요합니다. 삶을 추동하는 데는 힘이 필요합니다. 본능의 힘, 돈의 힘, 권력의 힘, 배경의 힘, 집념의 힘, 투지의 힘, 의지의 힘, 아름다움의 힘, 지식의 힘, 심지어 미움, 질투, 증오, 원한, 분노까지도 힘으로 작용합니다. 뜻밖에도 원한과 증오의 힘은 막강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힘들은 대부분 말할 수 없는 불행을 가져옵니다. 잠시 승리의 쾌감을 가져오는 것 같아도 결국은 파멸할 힘입니다.

윤석렬 대통령이 유난히 자유를 강조하면서도 결정적으로 결핍된 것이 있습니다. 그토록 자유는 무한 강조하면서도, 자유의 근본이 되는 인간존중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자율성을 존재로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유달리 약자들에 대해서 매몰찹니다. 이태원 참사자들과 유가족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가히 엽기적입니다. 그러면서도 법치를 강조하고, 헌법 수호를 강조합니다.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자들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에게서 평화라는 말을 들을 수 없는 것도 기이한 일입니다. 그의 집권 기간에 한반도가 어떤 상태에 이를지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럼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오로지 당신들만의 자유입니다. 부자들만의 자유이고, 기업하는 이들만의 자유이고, 성공한 이들만의 자유입니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참사 희생자들, 힘겨운 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매몰찬 자유입니다. 노동을 천시하고, 노동자를 노예 취급하는 저들의 멘탈리티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힘은 사랑의 힘뿐입니다. 참된 자유는 사랑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대림절은 바로 아기 예수께서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사랑의 힘을 우리에게 주시러 오는 절기입니다. 아멘.

(하태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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