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믿는 사람들이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마음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데 믿는 사람들이 그 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그랬고,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바리새주의, 율법주의, 교권주의가 다른 게 아닙니다. 참 신앙을 가로막는 적폐인 것이지요. 오늘날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당신들 가운데 서계시는 그분을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의 외침을 들어보실까요? “성문으로 나아가라.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 수축하고 돌을 제거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
바빌론 포로에서 1차로 귀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갖은 고생을 하며 폐허로 변한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보수하고, 삶의 터를 정돈하는데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저들은 아직도 귀환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동포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차별의식까지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야는 “성문 밖으로 나아가라”고 한 것이고, “길을 내라”고 한 것이고, 길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제거하라”고 한 것입니다.
* 해방정국에서도 우리는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이승만 중심의 미주파 사람들이 미군정과 손잡고 김구를 중심한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은 배척했습니다. 이런 갈등의 골을 치유하지 못하여 결국은 6·25 동족상잔을 불러들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보수와 진보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해방정국과 맞닿게 됩니다.
이사야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성 안에서’ 안온하게 살지 말고, 성문 밖으로 나아가 길을 열라고 한 것입니다.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는 말씀 역시 그래서 하신 나온 말입니다. 기득권에 천착하지 말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폐쇄적인 예루살렘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세계 인류를 위한 비전을 가지기를 바란 말씀입니다. 당시 선민사상에 젖은 외골수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환상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환상과 편견을 깨기를 바란 것입니다.
이 이사야의 정신을 그대로 물려받은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레위 출신 제사장으로서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일에 종사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당시 성전 당국과 제도권의 부패와 무능, 악행에 실망하여 광야로 나갑니다. 그는 거기서 성전 당국자들을 질타하며 회개를 요청합니다. 자연히 제도권 사람들은 매서운 눈으로 요한을 노려보며, “도대체 당신이 뭔데 그따위 소리 하느냐!”고 다그칩니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도 아니요, 예언자도 아니요. 다만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 1:23)라고 합니다. 자신은 단지 하늘의 뜻을 받아 울리는 소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임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 요한에게 유대인들은 무슨 꿍꿍이로 세례를 주느냐고 추궁합니다. 요한의 대답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당신들 가운데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분이 서 계시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못하오.”(요 1:26)
‘당신들은 내가 무엇인가를 도모하는 줄로 여기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런 사람이 못되오.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신 그 분의 신발 끈을 푸는 일도 감당 못할 사람이요. 이때 요한은 소문으로만 들은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낸 메시아임을 인지한 것으로 볼 수 있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런 분을 당신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내가 <소리>가 되어 외치는 것뿐이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요한의 외침야말로 진정 이사야가 ‘돌을 치우고’ ‘길을 열어라’고 외쳤던 바로 그 예언의 실천이 아닐 수 없습니다.
※ 한국교회에 내로라하는 목사들이 많지만 과연 세례 요한이 말한 것처럼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신 그분”을 알아보는 목사가 얼마나 될지, 아니면 알려고 하기나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시대정신을 관통하는 광야의 메시지를 들을 수 없습니다. 유신시대와 군사독재와 같은 지난 암흑의 시대에 김재준 강원용과 같은 이들의 시대를 관통하는 ‘광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내로라하는 목사들에게서 그런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신앙인은 더욱 분명한 어조로 말합니다. 믿음이 왜곡되고 변절된 시대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호소합니다. 오늘날처럼 믿음을 강조하고, 믿음이 넘쳐나는 시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믿음의 주”는 사라지고, ‘믿음의 욕구들’만 난무합니다. 그분의 실상(고난의 삶)은 없고, 그분이 베푸시는 표적의 화려함만 난무합니다. 히브리서 신앙인이 “믿음의 주를 바라보자”고 했을 때 무엇을 상정하고 하는 말인지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5-38)
무엇이 이처럼 고난과, 역경과 죽음의 공포를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바로 믿음의 주이신 예수를 온전히 바라보고 자신을 위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의 확산과 교회 성장을 동일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복음의 확산’은 주님을 영접함으로써 삶이 변화되고, 세상이 변화되는 것을 이른다면, ‘교회 성장’은 교회의 외형 즉 교회의 물량적 팽창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걱정해야 할 일은 교회 성장이 아닌 복음의 확산입니다. 우리 시대에 복음의 정신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입으로는 믿음을 말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은, 골수까지 침투한 세속의 가치에 오염된 세상을 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메시아의 강림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우리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불의가 날뛰는 데도 구경만 하며 뒷공론이나 하는 것도 복음의 확산을 저해하는 요인입니다. 마음을 비우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입니다. 겸손히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무관심 무기력에서 깨어납시다. 주께서 임하실 수 있도록 우리들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돌들을 제거합시다.
(하태영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믿는 사람들이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마음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데 믿는 사람들이 그 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그랬고,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바리새주의, 율법주의, 교권주의가 다른 게 아닙니다. 참 신앙을 가로막는 적폐인 것이지요. 오늘날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당신들 가운데 서계시는 그분을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의 외침을 들어보실까요? “성문으로 나아가라.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 수축하고 돌을 제거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
바빌론 포로에서 1차로 귀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갖은 고생을 하며 폐허로 변한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보수하고, 삶의 터를 정돈하는데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저들은 아직도 귀환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동포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차별의식까지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야는 “성문 밖으로 나아가라”고 한 것이고, “길을 내라”고 한 것이고, 길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제거하라”고 한 것입니다.
* 해방정국에서도 우리는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이승만 중심의 미주파 사람들이 미군정과 손잡고 김구를 중심한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은 배척했습니다. 이런 갈등의 골을 치유하지 못하여 결국은 6·25 동족상잔을 불러들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보수와 진보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해방정국과 맞닿게 됩니다.
이사야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성 안에서’ 안온하게 살지 말고, 성문 밖으로 나아가 길을 열라고 한 것입니다.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는 말씀 역시 그래서 하신 나온 말입니다. 기득권에 천착하지 말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폐쇄적인 예루살렘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세계 인류를 위한 비전을 가지기를 바란 말씀입니다. 당시 선민사상에 젖은 외골수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환상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환상과 편견을 깨기를 바란 것입니다.
이 이사야의 정신을 그대로 물려받은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레위 출신 제사장으로서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일에 종사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당시 성전 당국과 제도권의 부패와 무능, 악행에 실망하여 광야로 나갑니다. 그는 거기서 성전 당국자들을 질타하며 회개를 요청합니다. 자연히 제도권 사람들은 매서운 눈으로 요한을 노려보며, “도대체 당신이 뭔데 그따위 소리 하느냐!”고 다그칩니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도 아니요, 예언자도 아니요. 다만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 1:23)라고 합니다. 자신은 단지 하늘의 뜻을 받아 울리는 소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임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 요한에게 유대인들은 무슨 꿍꿍이로 세례를 주느냐고 추궁합니다. 요한의 대답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당신들 가운데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분이 서 계시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못하오.”(요 1:26)
‘당신들은 내가 무엇인가를 도모하는 줄로 여기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런 사람이 못되오.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신 그 분의 신발 끈을 푸는 일도 감당 못할 사람이요. 이때 요한은 소문으로만 들은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낸 메시아임을 인지한 것으로 볼 수 있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런 분을 당신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내가 <소리>가 되어 외치는 것뿐이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요한의 외침야말로 진정 이사야가 ‘돌을 치우고’ ‘길을 열어라’고 외쳤던 바로 그 예언의 실천이 아닐 수 없습니다.
※ 한국교회에 내로라하는 목사들이 많지만 과연 세례 요한이 말한 것처럼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신 그분”을 알아보는 목사가 얼마나 될지, 아니면 알려고 하기나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시대정신을 관통하는 광야의 메시지를 들을 수 없습니다. 유신시대와 군사독재와 같은 지난 암흑의 시대에 김재준 강원용과 같은 이들의 시대를 관통하는 ‘광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내로라하는 목사들에게서 그런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신앙인은 더욱 분명한 어조로 말합니다. 믿음이 왜곡되고 변절된 시대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호소합니다. 오늘날처럼 믿음을 강조하고, 믿음이 넘쳐나는 시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믿음의 주”는 사라지고, ‘믿음의 욕구들’만 난무합니다. 그분의 실상(고난의 삶)은 없고, 그분이 베푸시는 표적의 화려함만 난무합니다. 히브리서 신앙인이 “믿음의 주를 바라보자”고 했을 때 무엇을 상정하고 하는 말인지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5-38)
무엇이 이처럼 고난과, 역경과 죽음의 공포를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바로 믿음의 주이신 예수를 온전히 바라보고 자신을 위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의 확산과 교회 성장을 동일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복음의 확산’은 주님을 영접함으로써 삶이 변화되고, 세상이 변화되는 것을 이른다면, ‘교회 성장’은 교회의 외형 즉 교회의 물량적 팽창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걱정해야 할 일은 교회 성장이 아닌 복음의 확산입니다. 우리 시대에 복음의 정신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입으로는 믿음을 말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은, 골수까지 침투한 세속의 가치에 오염된 세상을 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메시아의 강림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우리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불의가 날뛰는 데도 구경만 하며 뒷공론이나 하는 것도 복음의 확산을 저해하는 요인입니다. 마음을 비우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입니다. 겸손히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무관심 무기력에서 깨어납시다. 주께서 임하실 수 있도록 우리들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돌들을 제거합시다.
(하태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