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꿈에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내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측면이 있고, 나 밖에서 다가오는 초월적인 힘이 작용해서 이뤄지기를 바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인간은 이 두 측면이 균형 잡혀 있어야 합니다. 내 능력으로 이루고자 하는 꿈만 있고, 나 밖에서 오는 꿈이 없다면, 어느 날 갑자기 시계가 멈추어 서듯이 인생 그 자체가 멈춰버릴 수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허무에 빠지고, 삶을 비관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나 스스로 이루고자 하는 꿈은 없고, 나 밖에서 오는 꿈에만 매달리면 그는 허상 속에서 사는 사람, 망상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럴 경우 지금 ‘이익’을 얻는 것보다 ‘믿음’(신용)을 얻는 게 얼마나 소중한 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세상을 본질적으로 새롭게 변화시켜주시는 계시적인 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꿈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스가랴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포로생활을 70년 가까이 되었을 때, 그 후반에 바빌론에서 태어난 제사장 출신 예언자입니다. 바빌론에서 먼저 귀환한 사람들은 무너진 성곽을 쌓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그러나 의욕처럼 성곽 재건은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점차 꿈을 잃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꿈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력이 고갈되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럴 때 스가랴는 그가 본 일곱 가지 환상을 통해 백성들에게 설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 가운데서 세 번째 환상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이가 측량줄을 들고 새로 조성할 예루살렘을 측량하기 위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 뒤에 천사가 따르면서 부질없는 일이라고 계속 되 뇌입니다. 스가랴 2장 4절 말씀을 들어봅시다.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여기 “성곽이 없는 촌락”이라는 말이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짐승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성벽이 필요 없는 광활한 땅을 새로운 삶의 터로 삼으시려는데, 젊은이는 이전에 예루살렘성이 비참하게 무너진 역사적 경험 때문인지, 어떤 침략에도 무너지지 않을 안온한 성터만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역사적 경험에만 매달리느라, 새롭게 전개할 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가 “그가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5)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을 지켜주시지 않으면 인간의 노력은 소용없게 됩니다. 스가랴의 위대한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이라는 다급한 처지만을 생각하느라, ‘내일’의 꿈을 상실한 백성들에게 ‘내일의 희망’ 즉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새로운 가능성을 보도록 설교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예루살렘 성내로 메시아가 입성하는 모습인데,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러운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메시아 입성은 여러 가지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선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좋게 말해서 아직은 때 묻지 않은 나귀 곧 훈련되지 않은 나귀입니다. 지금 당장 나귀를 이용하려는 사람은 이런 나귀는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나귀는 전쟁에 이용하는 군마와 달리 평화를 상징하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이 상징은, 메시아는 인간의 역사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를 환영하는 무리도 그렇습니다. 모두 가난한 사람들, 서민들, 소외된 사람들, 소위 갈릴리에서 올라온 ‘땅의 백성들’입니다. 이들 가운데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상징은 진정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며 환영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기득권자들로부터 배척된 메시아가 어떤 고초를 겪을 것인가를 예시하고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환호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무리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며 조롱합니다. 예수께서 뭐라 하십니까?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이 시대에, 이 사람들이 메시아의 희망을 말하지 않으면 돌들이라도 소리 질러 희망을 말할 것이다’라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시위대를 강력히 옹호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배척과 수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배척하고, 무엇을 수용하시는가?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진 메시아 곧 세상의 왕들을 배척하고, 사람들에 의해 배척된 예수를 메시아로 세우십니다. 부활이 죽음 가운데서만 실재하듯이, 새로운 인간의 탄생은 반드시 낡은 인간의 죽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능성은 인간이 스스로 가능성을 거둬들일 때 나타납니다. 내가 이루겠다고 위세를 부리는 한 하나님께서 개입할 자리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진리를 깨닫고,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한다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 11:25)고 한 것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함은 절망밖에 거둘 게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오히려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한 섭리로 사용하셨다는 게 바울의 해석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하나님의 지혜는 이렇게 어긋날 수 있음 역설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대림절은 막연히 내 꿈이 이뤄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오늘’이 험난할수록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희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내 꿈에만 열중한 나머지, 하나님께로 오는 꿈을 지니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치 휘어진 화살과 다를 바 없습니다. 휘어진 화살은 아무리 힘 들여 쏘아도 앞으로 날아가지 못합니다. 날마다 쳇바퀴를 돌듯 정신없이 살지만, 그 같은 삶에는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고, 피로만 쌓입니다. 그리고는 제 풀에 지쳐 쓰러집니다.
아무리 현실이 절박해도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향한 꿈을 잊지 맙시다. 저마다 삶의 중압감으로부터 오는 트라우마로 인해 동아뱀처럼 자기 꼬리를 붙잡고 매달릴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장벽 없는 성읍을 새로운 삶의 터로 가꾸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도마뱀처럼 자기 꼬리를 붙들고 매달리는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 밖에 계시는 하나님의 희망을 바라야 합니다. 진정 나의 무력함을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희망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오시는 메시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태영 목사)
인간의 꿈에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내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측면이 있고, 나 밖에서 다가오는 초월적인 힘이 작용해서 이뤄지기를 바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인간은 이 두 측면이 균형 잡혀 있어야 합니다. 내 능력으로 이루고자 하는 꿈만 있고, 나 밖에서 오는 꿈이 없다면, 어느 날 갑자기 시계가 멈추어 서듯이 인생 그 자체가 멈춰버릴 수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허무에 빠지고, 삶을 비관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나 스스로 이루고자 하는 꿈은 없고, 나 밖에서 오는 꿈에만 매달리면 그는 허상 속에서 사는 사람, 망상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럴 경우 지금 ‘이익’을 얻는 것보다 ‘믿음’(신용)을 얻는 게 얼마나 소중한 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세상을 본질적으로 새롭게 변화시켜주시는 계시적인 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꿈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스가랴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포로생활을 70년 가까이 되었을 때, 그 후반에 바빌론에서 태어난 제사장 출신 예언자입니다. 바빌론에서 먼저 귀환한 사람들은 무너진 성곽을 쌓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그러나 의욕처럼 성곽 재건은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점차 꿈을 잃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꿈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력이 고갈되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럴 때 스가랴는 그가 본 일곱 가지 환상을 통해 백성들에게 설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 가운데서 세 번째 환상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이가 측량줄을 들고 새로 조성할 예루살렘을 측량하기 위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 뒤에 천사가 따르면서 부질없는 일이라고 계속 되 뇌입니다. 스가랴 2장 4절 말씀을 들어봅시다.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여기 “성곽이 없는 촌락”이라는 말이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짐승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성벽이 필요 없는 광활한 땅을 새로운 삶의 터로 삼으시려는데, 젊은이는 이전에 예루살렘성이 비참하게 무너진 역사적 경험 때문인지, 어떤 침략에도 무너지지 않을 안온한 성터만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역사적 경험에만 매달리느라, 새롭게 전개할 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가 “그가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5)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을 지켜주시지 않으면 인간의 노력은 소용없게 됩니다. 스가랴의 위대한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이라는 다급한 처지만을 생각하느라, ‘내일’의 꿈을 상실한 백성들에게 ‘내일의 희망’ 즉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새로운 가능성을 보도록 설교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예루살렘 성내로 메시아가 입성하는 모습인데,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러운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메시아 입성은 여러 가지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선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좋게 말해서 아직은 때 묻지 않은 나귀 곧 훈련되지 않은 나귀입니다. 지금 당장 나귀를 이용하려는 사람은 이런 나귀는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나귀는 전쟁에 이용하는 군마와 달리 평화를 상징하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이 상징은, 메시아는 인간의 역사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를 환영하는 무리도 그렇습니다. 모두 가난한 사람들, 서민들, 소외된 사람들, 소위 갈릴리에서 올라온 ‘땅의 백성들’입니다. 이들 가운데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상징은 진정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며 환영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기득권자들로부터 배척된 메시아가 어떤 고초를 겪을 것인가를 예시하고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환호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무리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며 조롱합니다. 예수께서 뭐라 하십니까?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이 시대에, 이 사람들이 메시아의 희망을 말하지 않으면 돌들이라도 소리 질러 희망을 말할 것이다’라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시위대를 강력히 옹호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배척과 수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배척하고, 무엇을 수용하시는가?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진 메시아 곧 세상의 왕들을 배척하고, 사람들에 의해 배척된 예수를 메시아로 세우십니다. 부활이 죽음 가운데서만 실재하듯이, 새로운 인간의 탄생은 반드시 낡은 인간의 죽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능성은 인간이 스스로 가능성을 거둬들일 때 나타납니다. 내가 이루겠다고 위세를 부리는 한 하나님께서 개입할 자리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진리를 깨닫고,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한다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 11:25)고 한 것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함은 절망밖에 거둘 게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오히려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한 섭리로 사용하셨다는 게 바울의 해석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하나님의 지혜는 이렇게 어긋날 수 있음 역설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대림절은 막연히 내 꿈이 이뤄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오늘’이 험난할수록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희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내 꿈에만 열중한 나머지, 하나님께로 오는 꿈을 지니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치 휘어진 화살과 다를 바 없습니다. 휘어진 화살은 아무리 힘 들여 쏘아도 앞으로 날아가지 못합니다. 날마다 쳇바퀴를 돌듯 정신없이 살지만, 그 같은 삶에는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고, 피로만 쌓입니다. 그리고는 제 풀에 지쳐 쓰러집니다.
아무리 현실이 절박해도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향한 꿈을 잊지 맙시다. 저마다 삶의 중압감으로부터 오는 트라우마로 인해 동아뱀처럼 자기 꼬리를 붙잡고 매달릴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장벽 없는 성읍을 새로운 삶의 터로 가꾸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도마뱀처럼 자기 꼬리를 붙들고 매달리는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 밖에 계시는 하나님의 희망을 바라야 합니다. 진정 나의 무력함을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희망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오시는 메시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태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