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영혼에 불을 밝혀라>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어느 때 불을 밝힙니까? 어두울 때이지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는 석유 등잔에 불을 밝혔습니다. 형편이 좀 나아진 뒤로는 호롱에 불을 밝혔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밤이 되어 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날이 어둡기 전에, 호롱의 끄름을 닦아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특히 농사철에는 밤늦게까지 일이 끝나지 않기 때문에 항상 밤을 밝힐 등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전에 분당한신교회에서 목회하신 이윤재 목사님이 쓴 글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 글에 식탁에 불을 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성전이 무너지자 유대인들이 영혼의 중심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랍비 아키바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제 성전은 당신들 가정이오. 가정으로 가시오. 그리고 거기서 예배하시오”
유대인의 가정이 성전이 된 것은 이때부터라고 합니다. 가정이 성전인 만큼, 식탁의 촛불을 누가 켜느냐는 것도 중요합니다. 식탁의 촛불은 어머니가 켭니다. 먼저 두 개의 큰 초에 불을 붙이고, 다음 가족 수대로 작은 초에 불을 밝힙니다. 어머니가 촛불을 밝힌다는 것은, 어머니가 가정을 밝히는 불이라는 의미로 그리 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촛불을 켠 후, 아버지가 자녀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 기도를 합니다. 어머니가 촛불을 켜는 제사장이라면, 아버지는 자녀를 축복하는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상 이윤재)
서양에서 저녁 식탁에 촛불을 켜는 것은 바로 이런 유대교 전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유대인 가정에서 촛불에 대한 유래는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2세기(BC. 175-164). 시리아의 폭군 안티오커스 4세가 유다를 침공해서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성소를 더럽혔습니다. 그리고 성소의 불을 꺼버렸습니다. 성소의 불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밝히는 증거로 여겼는데, 시리아의 폭군은 유대인의 믿음과 저들의 희망을 꺾어버리기 위해 일부러 성소의 불을 꺼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자존감을 짓밟기 위해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돼지로 제사를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이때 마카비오 형제가 독립투쟁을 벌여서 성전을 회복하고 성소에 다시 불을 밝힌 일이 있습니다. 지금도 세계 각처에 사는 유대인들은 12월이면 ‘하누카’ 라는 축제를 벌이는데, 바로 성소에 광명의 불을 밝힌 사건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소에 불을 밝히는 전통이 가정의 식탁으로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식탁에 불을 밝힌 것은 바로 식구들의 영혼에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칠흑처럼 어두운 세상에서 가정의 식구들이 삶의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풍파 많은 세상에서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다니엘서는 영혼의 불을 밝히고 산 세 청년 이야기입니다. 유대 나라가 바빌론에 멸망하고, 사회 지도층 인사들, 특히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때 바빌론은 포로들에게 황제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절을 하거나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저 옛날 시리아처럼 바빌론도 유대인의 혼을 완전히 빼버리기 위해 이런 칙령을 내린 것입니다.
이렇게 황제의 칙령이 지엄한 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풀무 불 가운데 던져지는 형벌을 받게 됨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킨 것입니다. 사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황제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은 청년입니다. 황제는 유대인 포로 중에서 외모가 준수하고 지혜로운 청년을 골라서 3년 동안 황실에서 교육을 시키고, 그 중에서도 출중한 청년들을 다시 뽑아 자기 곁에서 섬기도록 했습니다. 이때 선택받은 청년들이 바로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왕의 지엄한 명령을 거부한 것입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풀무 불에 던져지는 고통 가운데서도 신앙 양심대로 행동하게 했겠습니까? 영혼을 밝힌 빛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잔악한 일제도 그랬습니다. 일제는 조선 백성 가운데 이용할 가치가 있는 지도급 인사들을 골라 특별대우를 했습니다. 높은 벼슬도 내리고, 작위도 내리고, 일본으로 데려가서 특별히 예우하며 교육도 시켰습니다. 그리하여 그런 특혜를 누린 이들의 정신은 점차 일본화 되어 일본을 위해 충성하는 자가 되어간 것입니다. 조선인으로서의 영혼의 빛을 잃고 오직 일본 천황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된 것이지요. 오늘날 친일파들은 그때 일제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입었거나 그 후손들, 그리고 자발적으로 친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기업이나 학술단체로부터 은밀하게 자금을 지원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황 생신축하 때마다 이들이 모이는 호텔은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영혼이 혼탁한 자들은 동족의 등에 비수를 꽂으면서 제 이익을 취합니다. 요즘 일본과 미국이 한국을 마치 종주국 대하듯 하는데도 노골적으로 저들 편을 드는 걸 보세요.
하지만 실망만 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로마라는 강대국과 그리고 그 강대국에 대한 굴종을 내면화한 기득권자들의 틈새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헌신하다 고난을 겪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 계시록 자체가 그런 내용을 담은 책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는 종말의 날에 최후의 비극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힘센 사자가 큰 맷돌을 들어 바다에 던지자 바다는 마치 맷돌이 존재하지도 않은 것처럼 덮쳐버립니다. 옛날 앗시리아의 영화가 그랬고, 바빌론의 영화가 그랬고, 페르시아의 영화가 그랬고, 당시 현존하는 로마의 영화가 그랬고, 다가올 인류의 영화가 그럴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세상은 부와 사치 첨단 기술로 무장했을지라도, 그 같은 것들은 바다에 가라앉을 맷돌과 다른 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런 맷돌과 같은 세상에 짓눌려 살지라도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올바로 보는 눈을 가진 것입니다. 당시 몸을 죽이는 자들이 누구겠습니까? 로마 제국이고, 그런 제국에 굴종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상대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권세와 영화에 주눅 들어서 종노릇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변화가 너무나 눈부시어 내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행여나 나만 뒤쳐지는 게 아닐까 해서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영원하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세상에 종노릇하기 쉽습니다. 비굴하게 살며 종노릇하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입니다. 주님은 우리 영혼을 밝히시는 빛입니다.
(하태영 목사)
<네 영혼에 불을 밝혀라>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어느 때 불을 밝힙니까? 어두울 때이지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는 석유 등잔에 불을 밝혔습니다. 형편이 좀 나아진 뒤로는 호롱에 불을 밝혔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밤이 되어 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날이 어둡기 전에, 호롱의 끄름을 닦아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특히 농사철에는 밤늦게까지 일이 끝나지 않기 때문에 항상 밤을 밝힐 등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전에 분당한신교회에서 목회하신 이윤재 목사님이 쓴 글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 글에 식탁에 불을 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성전이 무너지자 유대인들이 영혼의 중심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랍비 아키바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제 성전은 당신들 가정이오. 가정으로 가시오. 그리고 거기서 예배하시오”
유대인의 가정이 성전이 된 것은 이때부터라고 합니다. 가정이 성전인 만큼, 식탁의 촛불을 누가 켜느냐는 것도 중요합니다. 식탁의 촛불은 어머니가 켭니다. 먼저 두 개의 큰 초에 불을 붙이고, 다음 가족 수대로 작은 초에 불을 밝힙니다. 어머니가 촛불을 밝힌다는 것은, 어머니가 가정을 밝히는 불이라는 의미로 그리 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촛불을 켠 후, 아버지가 자녀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 기도를 합니다. 어머니가 촛불을 켜는 제사장이라면, 아버지는 자녀를 축복하는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상 이윤재)
서양에서 저녁 식탁에 촛불을 켜는 것은 바로 이런 유대교 전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유대인 가정에서 촛불에 대한 유래는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2세기(BC. 175-164). 시리아의 폭군 안티오커스 4세가 유다를 침공해서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성소를 더럽혔습니다. 그리고 성소의 불을 꺼버렸습니다. 성소의 불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밝히는 증거로 여겼는데, 시리아의 폭군은 유대인의 믿음과 저들의 희망을 꺾어버리기 위해 일부러 성소의 불을 꺼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자존감을 짓밟기 위해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돼지로 제사를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이때 마카비오 형제가 독립투쟁을 벌여서 성전을 회복하고 성소에 다시 불을 밝힌 일이 있습니다. 지금도 세계 각처에 사는 유대인들은 12월이면 ‘하누카’ 라는 축제를 벌이는데, 바로 성소에 광명의 불을 밝힌 사건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소에 불을 밝히는 전통이 가정의 식탁으로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식탁에 불을 밝힌 것은 바로 식구들의 영혼에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칠흑처럼 어두운 세상에서 가정의 식구들이 삶의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풍파 많은 세상에서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다니엘서는 영혼의 불을 밝히고 산 세 청년 이야기입니다. 유대 나라가 바빌론에 멸망하고, 사회 지도층 인사들, 특히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때 바빌론은 포로들에게 황제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절을 하거나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저 옛날 시리아처럼 바빌론도 유대인의 혼을 완전히 빼버리기 위해 이런 칙령을 내린 것입니다.
이렇게 황제의 칙령이 지엄한 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풀무 불 가운데 던져지는 형벌을 받게 됨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킨 것입니다. 사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황제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은 청년입니다. 황제는 유대인 포로 중에서 외모가 준수하고 지혜로운 청년을 골라서 3년 동안 황실에서 교육을 시키고, 그 중에서도 출중한 청년들을 다시 뽑아 자기 곁에서 섬기도록 했습니다. 이때 선택받은 청년들이 바로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왕의 지엄한 명령을 거부한 것입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풀무 불에 던져지는 고통 가운데서도 신앙 양심대로 행동하게 했겠습니까? 영혼을 밝힌 빛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잔악한 일제도 그랬습니다. 일제는 조선 백성 가운데 이용할 가치가 있는 지도급 인사들을 골라 특별대우를 했습니다. 높은 벼슬도 내리고, 작위도 내리고, 일본으로 데려가서 특별히 예우하며 교육도 시켰습니다. 그리하여 그런 특혜를 누린 이들의 정신은 점차 일본화 되어 일본을 위해 충성하는 자가 되어간 것입니다. 조선인으로서의 영혼의 빛을 잃고 오직 일본 천황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된 것이지요. 오늘날 친일파들은 그때 일제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입었거나 그 후손들, 그리고 자발적으로 친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기업이나 학술단체로부터 은밀하게 자금을 지원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황 생신축하 때마다 이들이 모이는 호텔은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영혼이 혼탁한 자들은 동족의 등에 비수를 꽂으면서 제 이익을 취합니다. 요즘 일본과 미국이 한국을 마치 종주국 대하듯 하는데도 노골적으로 저들 편을 드는 걸 보세요.
하지만 실망만 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로마라는 강대국과 그리고 그 강대국에 대한 굴종을 내면화한 기득권자들의 틈새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헌신하다 고난을 겪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 계시록 자체가 그런 내용을 담은 책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는 종말의 날에 최후의 비극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힘센 사자가 큰 맷돌을 들어 바다에 던지자 바다는 마치 맷돌이 존재하지도 않은 것처럼 덮쳐버립니다. 옛날 앗시리아의 영화가 그랬고, 바빌론의 영화가 그랬고, 페르시아의 영화가 그랬고, 당시 현존하는 로마의 영화가 그랬고, 다가올 인류의 영화가 그럴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세상은 부와 사치 첨단 기술로 무장했을지라도, 그 같은 것들은 바다에 가라앉을 맷돌과 다른 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런 맷돌과 같은 세상에 짓눌려 살지라도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올바로 보는 눈을 가진 것입니다. 당시 몸을 죽이는 자들이 누구겠습니까? 로마 제국이고, 그런 제국에 굴종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상대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권세와 영화에 주눅 들어서 종노릇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변화가 너무나 눈부시어 내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행여나 나만 뒤쳐지는 게 아닐까 해서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영원하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세상에 종노릇하기 쉽습니다. 비굴하게 살며 종노릇하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입니다. 주님은 우리 영혼을 밝히시는 빛입니다.
(하태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