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7. 19)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사람을 심판하실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으시는가? 오늘 마태가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물을 주고, 병든 이웃을 위로하고, 옥에 갇힌 이를 돕는 일 등 “지극히 작은 자”를 돕는 것을 심판의 기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이 <지극히 작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돕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돕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물 한 잔’ 베푸는 것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사소한 행위가 심판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하지만 이 안에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 주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믿음, 생명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목마름, 굶주림, 감옥에 갇힘은,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고, 원수로 여기고, 증오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 한 잔 마시라고 내미는 소박한 행위는 깨진 인간관계를 복원하는 소중한 뜻이 담긴 것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소박한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구체성이 없는 추상적인 사랑은 하기 쉽습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고··· 하는 식이지만 이 말에는 책임도 없고, 심판 기준도 없습니다.
다음으로 <지극히 작은 자>란 어떤 사람인가입니다. 결론적으로 그에게서 ‘아무런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자’입니다. 고맙다는 인사말조차 기대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닌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 스스로가 지극히 작은 자일 수 있고, 또한 지극히 작을 자를 도와야 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나는 도움을 받아야 할 작은 자’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비록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누가 가장 부유한 자인가? 자신이 받은 은총의 선물을 나누어 가지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법조문과 그가 지닌 사회적 지위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가 지닌 따뜻한 마음으로 심판합니다. 세상의 상찬은 업적으로 평가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흔적이 없는 은총의 결실로 평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과 같은 분별의 심판이 이뤄지는 나라입니다. 여기에도 또 다른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양과 염소를 비교적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 누가 양이고 누가 염소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염소가 양처럼 보이기도 하고, 양이 염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늑대가 양의 탈을 쓰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이런 거짓은 성공을 거두지 못합니다. 마지막 날 심판하시는 분은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세우십니다.
▣ (약2:14-26)
오늘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을 들어봅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야고보의 설교 말씀에는 당시 정황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 공동체는 그리스도인을 적대시하는 로마 정치권력에 직면해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럴 때 확실하게 그리스도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로마 제국이 가지지 못한 힘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 힘은 뜻밖에도 곤경에 처한 이들을 극진히 돌보는 데서 나왔습니다. 박해를 받고 추방당했거나, 곤경에 처한 이들을 그리스도 공동체가 형제자매들로 받아들이고 적극 도왔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때의 교회 공동체는 가정교회처럼 작은 규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규모가 작은 수많은 가정교회들의 연결망이 로마 제국의 박해를 이겨내면서, 마침내 로마제국의 폭력을 무력화시킨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이렇게 실제로 상호 교류와 밀접한 친교 공동체였는데, 점차 이런 믿음 생활이 희석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은 앞세우면서 그리스도 지체들을 외면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야고보의 설교는 여기서 나왔습니다. 야고보의 설교를 더 들어봅시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17)
곤경에 처한 지체들에 대한 연대와 돌봄을 회피하면서 믿음을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성소를 짓기 시작한 것은 주후 3세기 후반부터라고 합니다. 바로 그때부터 교회는 성소치장과 조직 관리에 힘을 쏟느라 초대 교회가 지녔던 그리스도 공동체는 점차 힘을 잃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편에서는 돈이 너무 많아 주체를 못하는데, 또 다른 편에서는 하루하루 허덕이며 살고 있습니다. 나라의 기강과 도덕성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습니다. 어디에도 순리는 없고 억지가 난무합니다. 특히 권력층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걱정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불평등과 불확실성 속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초대교회처럼 교회가 그리스도 지체들에 대한 책임과 연대성을 지니기에는 너무나 다른 환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의 산업구조는 작은 공동체들의 끈끈한 연대를 해체시키고, 개개인을 직업에 따라 파편화시키고 있습니다. 교회도 초대교회처럼 가정교회가 아닌 조직화된 거대 기관이 되었습니다. 요즘 교회들이 다락방이라든지, 목장목회라든지, 구역이라든지 하는 작은 구릅활동을 강화하는데, 그 목적이 초대교회처럼 돌봄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직 관리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입니다.
* 연전에 독일 카셀대의 김덕영 교수(사회학)는 한국적 자본주의의 정신과 본질을 분석한 <에리식톤 콤플렉스>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에리식톤은 신의 저주를 받아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느껴 끊임없이 먹어치우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입니다. 그의 책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세계 10대 경제대국임에도 돈과 물질적 재화를 향한 끝없는 욕망으로 여전히 배고파하는 한국 사회의 병적인 자본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돈과 물질적 재화에 대한 무한한 욕망으로 구축된 한국 자본주는 과연 누구에 의해, 어떻게 형성됐을까? 저자는 그 주범으로 국가, 재벌, 개신교를 꼽습니다. 박정희 정권으로 대표되는 국가가 ‘잘살아보세’라며 개인에게 돈과 물질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자극했고, 정주영으로 상징되는 재벌들이 ‘하면 된다’며 기업적 차원에서 욕망을 더욱 확장·구현했고, 여기에 조용기로 대표되는 개신교가 ‘삼박자구원론’으로 욕망을 신앙의 이름으로 성화(聖化)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에리식톤 콤플렉스 전도사로 활약한 개신교는 이를 내면화해서 물질적인 교회성장을 이룩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저자는 책에서 어떻게 하면 채워지지 않을 허기를 달랠 진정한 자본주의가 가능할지 그 해결 방안도 제시하는데 그 중에 개신교에 대한 주문 가운데 하나가 흥미롭습니다. 개신교가 자본주의 주술사 노릇을 청산하고 영혼의 구원 등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한국의 교회가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기는 합니다. (첫째, 국가와 재벌의 ‘동맹자본주의’를 해체. 둘째, 집단주의 정신을 근대적 개인주의 정신으로의 대체).
사실 이 마지막 제안 즉 개신교가 자본주의 주술사 노릇을 청산하고 영혼구원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회복하는 일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의 감사절 제사의 고유문에 나타난 ‘공동체 정신’의 회복에 있다고 봅니다. 신명기 정신은 물질을 영적으로 성화시킴으로서 소유욕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물질에 걸신 든 인간이 아닌 영적으로 부유한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입니다.
(하태영 목사)
▣ (15. 7. 19)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사람을 심판하실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으시는가? 오늘 마태가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물을 주고, 병든 이웃을 위로하고, 옥에 갇힌 이를 돕는 일 등 “지극히 작은 자”를 돕는 것을 심판의 기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이 <지극히 작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돕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돕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물 한 잔’ 베푸는 것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사소한 행위가 심판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하지만 이 안에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 주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믿음, 생명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목마름, 굶주림, 감옥에 갇힘은,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고, 원수로 여기고, 증오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 한 잔 마시라고 내미는 소박한 행위는 깨진 인간관계를 복원하는 소중한 뜻이 담긴 것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소박한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구체성이 없는 추상적인 사랑은 하기 쉽습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고··· 하는 식이지만 이 말에는 책임도 없고, 심판 기준도 없습니다.
다음으로 <지극히 작은 자>란 어떤 사람인가입니다. 결론적으로 그에게서 ‘아무런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자’입니다. 고맙다는 인사말조차 기대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닌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 스스로가 지극히 작은 자일 수 있고, 또한 지극히 작을 자를 도와야 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나는 도움을 받아야 할 작은 자’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비록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누가 가장 부유한 자인가? 자신이 받은 은총의 선물을 나누어 가지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법조문과 그가 지닌 사회적 지위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가 지닌 따뜻한 마음으로 심판합니다. 세상의 상찬은 업적으로 평가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흔적이 없는 은총의 결실로 평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과 같은 분별의 심판이 이뤄지는 나라입니다. 여기에도 또 다른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양과 염소를 비교적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 누가 양이고 누가 염소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염소가 양처럼 보이기도 하고, 양이 염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늑대가 양의 탈을 쓰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이런 거짓은 성공을 거두지 못합니다. 마지막 날 심판하시는 분은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세우십니다.
▣ (약2:14-26)
오늘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을 들어봅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야고보의 설교 말씀에는 당시 정황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 공동체는 그리스도인을 적대시하는 로마 정치권력에 직면해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럴 때 확실하게 그리스도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로마 제국이 가지지 못한 힘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 힘은 뜻밖에도 곤경에 처한 이들을 극진히 돌보는 데서 나왔습니다. 박해를 받고 추방당했거나, 곤경에 처한 이들을 그리스도 공동체가 형제자매들로 받아들이고 적극 도왔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때의 교회 공동체는 가정교회처럼 작은 규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규모가 작은 수많은 가정교회들의 연결망이 로마 제국의 박해를 이겨내면서, 마침내 로마제국의 폭력을 무력화시킨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이렇게 실제로 상호 교류와 밀접한 친교 공동체였는데, 점차 이런 믿음 생활이 희석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은 앞세우면서 그리스도 지체들을 외면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야고보의 설교는 여기서 나왔습니다. 야고보의 설교를 더 들어봅시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17)
곤경에 처한 지체들에 대한 연대와 돌봄을 회피하면서 믿음을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성소를 짓기 시작한 것은 주후 3세기 후반부터라고 합니다. 바로 그때부터 교회는 성소치장과 조직 관리에 힘을 쏟느라 초대 교회가 지녔던 그리스도 공동체는 점차 힘을 잃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편에서는 돈이 너무 많아 주체를 못하는데, 또 다른 편에서는 하루하루 허덕이며 살고 있습니다. 나라의 기강과 도덕성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습니다. 어디에도 순리는 없고 억지가 난무합니다. 특히 권력층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걱정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불평등과 불확실성 속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초대교회처럼 교회가 그리스도 지체들에 대한 책임과 연대성을 지니기에는 너무나 다른 환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의 산업구조는 작은 공동체들의 끈끈한 연대를 해체시키고, 개개인을 직업에 따라 파편화시키고 있습니다. 교회도 초대교회처럼 가정교회가 아닌 조직화된 거대 기관이 되었습니다. 요즘 교회들이 다락방이라든지, 목장목회라든지, 구역이라든지 하는 작은 구릅활동을 강화하는데, 그 목적이 초대교회처럼 돌봄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직 관리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입니다.
* 연전에 독일 카셀대의 김덕영 교수(사회학)는 한국적 자본주의의 정신과 본질을 분석한 <에리식톤 콤플렉스>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에리식톤은 신의 저주를 받아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느껴 끊임없이 먹어치우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입니다. 그의 책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세계 10대 경제대국임에도 돈과 물질적 재화를 향한 끝없는 욕망으로 여전히 배고파하는 한국 사회의 병적인 자본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돈과 물질적 재화에 대한 무한한 욕망으로 구축된 한국 자본주는 과연 누구에 의해, 어떻게 형성됐을까? 저자는 그 주범으로 국가, 재벌, 개신교를 꼽습니다. 박정희 정권으로 대표되는 국가가 ‘잘살아보세’라며 개인에게 돈과 물질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자극했고, 정주영으로 상징되는 재벌들이 ‘하면 된다’며 기업적 차원에서 욕망을 더욱 확장·구현했고, 여기에 조용기로 대표되는 개신교가 ‘삼박자구원론’으로 욕망을 신앙의 이름으로 성화(聖化)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에리식톤 콤플렉스 전도사로 활약한 개신교는 이를 내면화해서 물질적인 교회성장을 이룩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저자는 책에서 어떻게 하면 채워지지 않을 허기를 달랠 진정한 자본주의가 가능할지 그 해결 방안도 제시하는데 그 중에 개신교에 대한 주문 가운데 하나가 흥미롭습니다. 개신교가 자본주의 주술사 노릇을 청산하고 영혼의 구원 등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한국의 교회가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기는 합니다. (첫째, 국가와 재벌의 ‘동맹자본주의’를 해체. 둘째, 집단주의 정신을 근대적 개인주의 정신으로의 대체).
사실 이 마지막 제안 즉 개신교가 자본주의 주술사 노릇을 청산하고 영혼구원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회복하는 일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의 감사절 제사의 고유문에 나타난 ‘공동체 정신’의 회복에 있다고 봅니다. 신명기 정신은 물질을 영적으로 성화시킴으로서 소유욕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물질에 걸신 든 인간이 아닌 영적으로 부유한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입니다.
(하태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