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은 바로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여 다윗이 지어 부르게 한 조가(弔歌)입니다. 우리가 이 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앞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입니다. 북쪽에서는 블레셋의 공격을 받았고, 남쪽에서는 아말렉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전선이 확대되자 사울은 아들 요나단과 함께 북쪽 전선에서 블레셋과 전투를 벌였고, 다윗은 남쪽 전선에서 아말렉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윗은 아말렉을 철저히 응징하는 성과를 거둔 반면, 블레셋과 전투를 벌인 사울왕은 참혹하게 패전하는 불행을 당하게 됩니다. 설화자는 이 슬픈 이야기를 상세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선제공격을 받고 최후 전선이 무너지면서, 사울은 아들 셋이 모두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때 사울은 적의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었으나, 병사들은 다 도망치고 곁에는 호위병 하나만 남았습니다. 낙담한 사울은 적의 손에 죽임 당하는 치욕을 피하기 위해(삼상 31:4), 호위병더러 자기를 칼로 찔러 죽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호위병은 감히 왕인 사울을 찌르지 못합니다. 사울은 하는 수 없이 자기 칼을 뽑아 거꾸로 세우고 그 위에 엎어져 자결합니다. 호위병도 주군 사울이 죽자 그 자리에서 자결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의 갑옷을 벗겨 아스다롯 신전에 보관하고, 시신은 벳산 성벽에 매달았습니다. 다행히 전에 사울이 암몬으로부터 구해준 길르앗 야베스의 용사들이 밤을 타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신을 거둬다가 화장하고, 뼈는 거두어 에셀 나무 아래 묻고 이레 동안 금식하며 사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사울은 마지막 주검이나마 왕으로서의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사건은 여기서 새롭게 전개됩니다. 사울 진영에서 왔다는 젊은이 하나가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들고 다윗 진영을 찾아왔습니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이미 죽게 된 사울이 자기를 불러 죽여 달라고 해서 그렇게 하고, 그의 왕관과 팔찌를 벗겨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사울이 자결했다는 이야기와는 다릅니다만, 큰 인물이 죽었으니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울의 죽음은 다윗에게 알려집니다. 다윗으로서는 그토록 자기를 죽이려 했던 사울이 죽었으니 속으로 쾌재를 부를 만도 한 일이지요. 그러나 다윗은 뜻밖에도 해가 질 때까지 크게 슬퍼하며 탄식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아말렉의 젊은이를 불러 심문합니다.
다윗 : “너는 어디 사람이냐”
젊은이 : “아말렉 사람 외국인(‘겔’ רג/나그네, 기류민)의 아들[입니다]”
‘겔’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사는 다른 종족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어떤 보상을 노리고 사울의 왕관을 가지고 다윗 진영으로 찾아왔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자기 스스로 사울 왕을 죽였다고 자백한 데 있습니다.
다윗은 “주께서 기름부어 세운 자를 죽게 한”(1:14) 죄를 물어 젊은이를 처형합니다. 다윗은 감히 이스라엘의 왕을 죽인 자에 대한 징벌을 내린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을 우리가 주목해 보게 됩니다. 공적인 직무를 맡은 사람들의 자질이 그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정치가 혼탁한 것은 이런 공적인 직무와 사적인 관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치인들이 보상을 노리고 망나니처럼 행동하는 자들, 요사스런 말을 입에 담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월호 참사 때도 보상을 노리고 저주에 가까운 막말을 해댄 정치인들이 한둘이 아니었지요. 이태원 참사에서는, 모두가 사과할 줄 모르는 대통령을 닮아서 그런지 총리도, 행자부 장관도, 서울시장도, 용산구청장도, 어느 누구 하나 사과하는 자가 없고, 책임회피성 발언만 늘어놓습니다. 물론 피할 수 없는 물증이 나오자 나중에 사과했습니다만, 행자부 장관이라는 자(이상민)는 경찰을 많이 보냈어도 사고를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놨습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는 관행대로만 대처해서는 안 된다고 마치 매뉴얼이 없어 사고 대책을 세우지 못한 것처럼 말했습니다. 더 이해 못할 일은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하고, 조문객들에게 조문 리본에 ‘근조’라는 문구를 쓰지 말라, 위패와 영정을 올리지 말라, 참사라 하지 말고 사망이라 하라, 희생자라 하지 말고 사망자라 하라는 등의 해괴한 지침을 내린 것입니다. 알고 보니 다급한 목소리로 112신고를 수없이 했음에도 경찰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고위공직자들은 대통령 옹위하는 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위공직자들은 시키지 않은 일 하면 책임추궁 당하는데, 위에서 지시하지 않은 일을 누가 하겠습니까! 모든 공직자들이 국민을 섬기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은 바로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여 다윗이 지어 부르게 한 조가(弔歌)입니다.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삼하 1:19)
정적의 죽음을 두고 이스라엘의 영광은 무엇이고, 두 용사는 무엇인가? 사실 처음 왕 사울은 이스라엘의 꿈과 희망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사나운 발톱을 벗어나 가나안에 정착해서 나그네들이 학대받지 않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려 했지만, 주변의 아말렉과 블레셋 같은 부족들로부터 끊임없이 능욕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냉혹한 현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그토록 싫어하던 왕을 세워 강력한 나라를 건설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운 왕이 바로 사울입니다. 그런 왕이 이방인들에 의해 처참하게 죽었으니, 이거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무너진 것이요, 이스라엘의 꿈과 희망이 무너진 것입니다. 다윗의 조가는 이런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닌 ‘슬픔의 파토스’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통일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공동체가 지닌 슬픔의 파토스에 공감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는 개인적 원한과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한 공적인 직무를 분별할 줄 아는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지도자에게 진정한 승리는 자신의 개인적 승리가 아닌 공동체의 승리여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 풍토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지도자상입니다. 어쩌면 이순신 장군에게서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고, 삭탈관직을 당했음에도, 백의종군도 마다하지 않은 것은 바로 전란으로 고통 받는 백성을 구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본 요한계시록은 최후 심판 이야기도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가를 증언합니다. 그런데 평소 우리가 생각하는 승리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여기서 승리자들은 두 가지의 노래를 부릅니다.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 가운데 순교자들의 영웅담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의로우심만을 찬양합니다.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까 / 오직 주만 거룩하시나이다 /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계 15:3-4)
이 노래가 주는 메시지는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이 세상에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성서는 저들의 영웅담에 대해서는 냉담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만을 찬양합니다.
오늘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로 부름 받은 사람으로 특별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에게서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게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7)
서로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고난 중에 승리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승리를 찬양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받은 사랑을 갚으며 삶으로서 승리하야 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모두 승리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아멘.(하태영 목사)
자료 : 설득의 3대 요소 -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고 평했다. 인간은 개인으로서 존재하지만, 그 개인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사회 속에 존재한다는 얘기다. 그 사회의 구성원이 되려면 타인과 대화를 해야 하고, 대화를 풀어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설득’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득의 중요성을 설파한 것도 그래서다.
그가 《수사학Ars Rhetorica》에서 강조한 설득의 3대 요소는 에토스Ethos(인품·인격), 파토스Pathos(감성), 로고스Logos(이성)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에토스다. 화자話者가 아무리 말을 잘한들 화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신뢰성이 떨어지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화자의 인격이고 신뢰감이다.
파토스는 청중의 감정이나 욕구에 호소해 마음을 움직이는 설득 수단이다. 먼저 청중의 심리적 상태나 욕구 등을 고려해 설득해야 한다는 얘기다.
로고스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는 방법이다. 객관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로고스가 ‘논리학logic’과 학문을 의미하는 ‘로지logy’의 어원이 된 것도 그래서다. 병을 연구하는 학문인 ‘병리학pathology’은 병을 의미하는 파토스와 학문을 의미하는 로고스가 합쳐진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로고스가 파토스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은 바로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여 다윗이 지어 부르게 한 조가(弔歌)입니다. 우리가 이 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앞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입니다. 북쪽에서는 블레셋의 공격을 받았고, 남쪽에서는 아말렉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전선이 확대되자 사울은 아들 요나단과 함께 북쪽 전선에서 블레셋과 전투를 벌였고, 다윗은 남쪽 전선에서 아말렉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윗은 아말렉을 철저히 응징하는 성과를 거둔 반면, 블레셋과 전투를 벌인 사울왕은 참혹하게 패전하는 불행을 당하게 됩니다. 설화자는 이 슬픈 이야기를 상세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선제공격을 받고 최후 전선이 무너지면서, 사울은 아들 셋이 모두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때 사울은 적의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었으나, 병사들은 다 도망치고 곁에는 호위병 하나만 남았습니다. 낙담한 사울은 적의 손에 죽임 당하는 치욕을 피하기 위해(삼상 31:4), 호위병더러 자기를 칼로 찔러 죽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호위병은 감히 왕인 사울을 찌르지 못합니다. 사울은 하는 수 없이 자기 칼을 뽑아 거꾸로 세우고 그 위에 엎어져 자결합니다. 호위병도 주군 사울이 죽자 그 자리에서 자결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의 갑옷을 벗겨 아스다롯 신전에 보관하고, 시신은 벳산 성벽에 매달았습니다. 다행히 전에 사울이 암몬으로부터 구해준 길르앗 야베스의 용사들이 밤을 타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신을 거둬다가 화장하고, 뼈는 거두어 에셀 나무 아래 묻고 이레 동안 금식하며 사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사울은 마지막 주검이나마 왕으로서의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사건은 여기서 새롭게 전개됩니다. 사울 진영에서 왔다는 젊은이 하나가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들고 다윗 진영을 찾아왔습니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이미 죽게 된 사울이 자기를 불러 죽여 달라고 해서 그렇게 하고, 그의 왕관과 팔찌를 벗겨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사울이 자결했다는 이야기와는 다릅니다만, 큰 인물이 죽었으니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울의 죽음은 다윗에게 알려집니다. 다윗으로서는 그토록 자기를 죽이려 했던 사울이 죽었으니 속으로 쾌재를 부를 만도 한 일이지요. 그러나 다윗은 뜻밖에도 해가 질 때까지 크게 슬퍼하며 탄식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아말렉의 젊은이를 불러 심문합니다.
다윗 : “너는 어디 사람이냐”
젊은이 : “아말렉 사람 외국인(‘겔’ רג/나그네, 기류민)의 아들[입니다]”
‘겔’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사는 다른 종족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어떤 보상을 노리고 사울의 왕관을 가지고 다윗 진영으로 찾아왔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자기 스스로 사울 왕을 죽였다고 자백한 데 있습니다.
다윗은 “주께서 기름부어 세운 자를 죽게 한”(1:14) 죄를 물어 젊은이를 처형합니다. 다윗은 감히 이스라엘의 왕을 죽인 자에 대한 징벌을 내린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을 우리가 주목해 보게 됩니다. 공적인 직무를 맡은 사람들의 자질이 그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정치가 혼탁한 것은 이런 공적인 직무와 사적인 관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치인들이 보상을 노리고 망나니처럼 행동하는 자들, 요사스런 말을 입에 담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월호 참사 때도 보상을 노리고 저주에 가까운 막말을 해댄 정치인들이 한둘이 아니었지요. 이태원 참사에서는, 모두가 사과할 줄 모르는 대통령을 닮아서 그런지 총리도, 행자부 장관도, 서울시장도, 용산구청장도, 어느 누구 하나 사과하는 자가 없고, 책임회피성 발언만 늘어놓습니다. 물론 피할 수 없는 물증이 나오자 나중에 사과했습니다만, 행자부 장관이라는 자(이상민)는 경찰을 많이 보냈어도 사고를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놨습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는 관행대로만 대처해서는 안 된다고 마치 매뉴얼이 없어 사고 대책을 세우지 못한 것처럼 말했습니다. 더 이해 못할 일은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하고, 조문객들에게 조문 리본에 ‘근조’라는 문구를 쓰지 말라, 위패와 영정을 올리지 말라, 참사라 하지 말고 사망이라 하라, 희생자라 하지 말고 사망자라 하라는 등의 해괴한 지침을 내린 것입니다. 알고 보니 다급한 목소리로 112신고를 수없이 했음에도 경찰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고위공직자들은 대통령 옹위하는 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위공직자들은 시키지 않은 일 하면 책임추궁 당하는데, 위에서 지시하지 않은 일을 누가 하겠습니까! 모든 공직자들이 국민을 섬기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은 바로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여 다윗이 지어 부르게 한 조가(弔歌)입니다.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삼하 1:19)
정적의 죽음을 두고 이스라엘의 영광은 무엇이고, 두 용사는 무엇인가? 사실 처음 왕 사울은 이스라엘의 꿈과 희망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사나운 발톱을 벗어나 가나안에 정착해서 나그네들이 학대받지 않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려 했지만, 주변의 아말렉과 블레셋 같은 부족들로부터 끊임없이 능욕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냉혹한 현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그토록 싫어하던 왕을 세워 강력한 나라를 건설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운 왕이 바로 사울입니다. 그런 왕이 이방인들에 의해 처참하게 죽었으니, 이거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무너진 것이요, 이스라엘의 꿈과 희망이 무너진 것입니다. 다윗의 조가는 이런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닌 ‘슬픔의 파토스’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통일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공동체가 지닌 슬픔의 파토스에 공감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는 개인적 원한과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한 공적인 직무를 분별할 줄 아는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지도자에게 진정한 승리는 자신의 개인적 승리가 아닌 공동체의 승리여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 풍토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지도자상입니다. 어쩌면 이순신 장군에게서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고, 삭탈관직을 당했음에도, 백의종군도 마다하지 않은 것은 바로 전란으로 고통 받는 백성을 구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본 요한계시록은 최후 심판 이야기도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가를 증언합니다. 그런데 평소 우리가 생각하는 승리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여기서 승리자들은 두 가지의 노래를 부릅니다.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 가운데 순교자들의 영웅담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의로우심만을 찬양합니다.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까 / 오직 주만 거룩하시나이다 /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계 15:3-4)
이 노래가 주는 메시지는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이 세상에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성서는 저들의 영웅담에 대해서는 냉담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만을 찬양합니다.
오늘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로 부름 받은 사람으로 특별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에게서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게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7)
서로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고난 중에 승리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승리를 찬양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받은 사랑을 갚으며 삶으로서 승리하야 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모두 승리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아멘.(하태영 목사)
자료 : 설득의 3대 요소 -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고 평했다. 인간은 개인으로서 존재하지만, 그 개인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사회 속에 존재한다는 얘기다. 그 사회의 구성원이 되려면 타인과 대화를 해야 하고, 대화를 풀어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설득’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득의 중요성을 설파한 것도 그래서다.
그가 《수사학Ars Rhetorica》에서 강조한 설득의 3대 요소는 에토스Ethos(인품·인격), 파토스Pathos(감성), 로고스Logos(이성)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에토스다. 화자話者가 아무리 말을 잘한들 화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신뢰성이 떨어지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화자의 인격이고 신뢰감이다.
파토스는 청중의 감정이나 욕구에 호소해 마음을 움직이는 설득 수단이다. 먼저 청중의 심리적 상태나 욕구 등을 고려해 설득해야 한다는 얘기다.
로고스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는 방법이다. 객관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로고스가 ‘논리학logic’과 학문을 의미하는 ‘로지logy’의 어원이 된 것도 그래서다. 병을 연구하는 학문인 ‘병리학pathology’은 병을 의미하는 파토스와 학문을 의미하는 로고스가 합쳐진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로고스가 파토스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