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도 일본의 중소기업 회사원 요시노 아키라(吉野彰)라는 사람이 노벨 화학상 공동수상자로 결정된 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수상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쓸데없는 일을 잔뜩 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고, 동문서답 같은 대답을 했는데, 그가 말한 ‘쓸데없는 일’이란 ‘자기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반어법이 아닐까’ 라고 나름으로 생각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로서는 성공에 대한 강박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성공한 인물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면서도, 미래를 내다보고 기초를 다지는 데는 관심이 미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믿고 존중하는 데서 과학적 성과를 내는 것이지, 사람을 신뢰하지 않고, 극심한 경쟁으로 줄 세우는 데서는 결코 창조적인 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기초과학의 성과는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지금 한국처럼 극심한 경쟁사회, 그것도 ‘적대적 경쟁사회’에서는 동료 간의 협력이 이뤄질 수 없다는 점에서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사무엘서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에 무엇을 보시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처음왕인 사울에 대해 실망하시고, 당시 제사장인 사무엘에게 새 인물을 세우도록 하셨을 때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읽은 삼상 16장 7절에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내가 이미 그를 버렸다”는 사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울은 용모는 준수했지만, 교만한데다, 하는 일마다 헛발질로 실망만을 안겨서 하나님께서 그런 사울을 버리기로 하신 것입니다.
본문 16장 12절은 다윗을 가리켜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에 다윗을 미화하기 위해 기록한 말로 보는 이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보다는 사무엘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게 합당할 것입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을 당시 미성년자였습니다. 아버지 이새는 그를 단지 어린애 취급했고, 형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집안에서 얼마나 무시된 존재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제사장 사무엘이 와서 장차 왕의 재목을 선택하는 이 중요한 자리에 다른 아들은 다 불렀지만, 다윗만큼은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장차 나라를 위해 크게 쓰임 받을 인물로 어린 다윗은 아버지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것입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다윗은 형들이 중요한 자리에 나아간 동안, 들에서 양들을 돌보며 형들의 뒤치다꺼리나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사무엘은 자기 앞에 나온 이새의 아들들을 무려 일곱이나 다 살펴본 뒤 또 다른 아들이 없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때서야 이새는 지금 들에서 양을 돌보고 있는 막내가 있음을 실토합니다. 여기서 사무엘은 또 한 번 놀라운 말을 합니다.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않겠다”
고 한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 왕으로 헌신할 인물을 선택하는 자리입니다. 이럴 때 사무엘이 적당히 대접 받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만큼 사무엘은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물 즉 공적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인물, 정의를 실천할 인물을 선택하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했던 것입니다.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삼상 16:12)
하나님께서 어린 다윗을 합당한 인물로 보신다는 표현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지금 결과를 보지 않고 장래의 가능성으로 보시는 분이십니다. 다 자란 나무를 보지 않고, 어린 나무이지만 자랐을 때 그 쓸모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새는 아버지로서 아들들의 속내를 누구보다도 잘 알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이새는 아들들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안 그런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세상 이목에 너무 민감합니다. 특별히 자녀 교육에는 더 그럽니다.
사도행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이렇게 시작하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 역시 인간의 편견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행 2장 22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바로 당신들이 죽인 예수는 큰 권능과 기적과 표적을 베푸시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임을 증거 하셨음에도, 당신들의 편견과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지 않았던가. 당신들은 그를 하찮게 보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메시아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는 그의 증인들이다.”
참으로 뼈아픈 지적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편견과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인해 완전히 무시되고, 배척되고,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신화 속에 있는 다윗은 장차 나타날 메시아의 표상으로 여기면서도, 그런 다윗까지도 기다렸던 메시아에 대해서는 무지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인간의 관점이란 이렇게 편견과 무지로 가득합니다. 백성들은 영광스런 다윗만을 생각했지, 그가 얼마나 무시된 가운데서 선택된 인물이었는가는 잊고 지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세상 풍조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리스도는) 뉘 자손이냐”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대답입니다.
“그야 당연히 다윗의 자손이지요.”
바로 이 대목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인 게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인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게 더 중요했습니다(마 1:18-25; 2:15; 3:17 등).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혈통이 중요했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인정이 더 중요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사람을 보는 관점과 예수께서 사람을 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릅니다. 이런 바리새인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매사를 보고, 판단하고, 삶의 목표로 삼는 일들이 얼마나 형편없겠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보는 관점도, 자식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도, 자식을 교육시키는 열정도 그 중심을 보기보다는 항상 ‘남과 비교해서 보는’ 세상 이목이 앞섭니다.
국정을 맡은 이들이 나라의 100년 앞은 고사하고, 자기 앞의 정적을 모두 없애버리기 위해 여론 조작할 생각만 합니다. 부모들은 자녀의 교육을 마치 부동산 투기를 하는 것처럼 합니다. 이제는 아예 자녀의 학력까지도 세습을 합니다. 신앙생활도 겉모습이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믿음 생활을 유행 따라서, 분위기에 따라서 철새처럼 옮겨 다니는 무리가 있습니다. 자기중심을 바르게 할 생각은 안 하고, 어디 가면 은혜가 차고 넘친다더라 하는 소문을 따라 다닙니다.
세상을 중심으로 본다는 것은 주체성을 지닌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아야 세상의 본질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외모가 아니라 마음을 가꿔야 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비록 모자랄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태영 목사)
지난 2019년도 일본의 중소기업 회사원 요시노 아키라(吉野彰)라는 사람이 노벨 화학상 공동수상자로 결정된 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수상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쓸데없는 일을 잔뜩 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고, 동문서답 같은 대답을 했는데, 그가 말한 ‘쓸데없는 일’이란 ‘자기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반어법이 아닐까’ 라고 나름으로 생각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로서는 성공에 대한 강박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성공한 인물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면서도, 미래를 내다보고 기초를 다지는 데는 관심이 미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믿고 존중하는 데서 과학적 성과를 내는 것이지, 사람을 신뢰하지 않고, 극심한 경쟁으로 줄 세우는 데서는 결코 창조적인 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기초과학의 성과는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지금 한국처럼 극심한 경쟁사회, 그것도 ‘적대적 경쟁사회’에서는 동료 간의 협력이 이뤄질 수 없다는 점에서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사무엘서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에 무엇을 보시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처음왕인 사울에 대해 실망하시고, 당시 제사장인 사무엘에게 새 인물을 세우도록 하셨을 때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읽은 삼상 16장 7절에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내가 이미 그를 버렸다”는 사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울은 용모는 준수했지만, 교만한데다, 하는 일마다 헛발질로 실망만을 안겨서 하나님께서 그런 사울을 버리기로 하신 것입니다.
본문 16장 12절은 다윗을 가리켜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에 다윗을 미화하기 위해 기록한 말로 보는 이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보다는 사무엘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게 합당할 것입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을 당시 미성년자였습니다. 아버지 이새는 그를 단지 어린애 취급했고, 형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집안에서 얼마나 무시된 존재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제사장 사무엘이 와서 장차 왕의 재목을 선택하는 이 중요한 자리에 다른 아들은 다 불렀지만, 다윗만큼은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장차 나라를 위해 크게 쓰임 받을 인물로 어린 다윗은 아버지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것입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다윗은 형들이 중요한 자리에 나아간 동안, 들에서 양들을 돌보며 형들의 뒤치다꺼리나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사무엘은 자기 앞에 나온 이새의 아들들을 무려 일곱이나 다 살펴본 뒤 또 다른 아들이 없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때서야 이새는 지금 들에서 양을 돌보고 있는 막내가 있음을 실토합니다. 여기서 사무엘은 또 한 번 놀라운 말을 합니다.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않겠다”
고 한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 왕으로 헌신할 인물을 선택하는 자리입니다. 이럴 때 사무엘이 적당히 대접 받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만큼 사무엘은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물 즉 공적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인물, 정의를 실천할 인물을 선택하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했던 것입니다.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삼상 16:12)
하나님께서 어린 다윗을 합당한 인물로 보신다는 표현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지금 결과를 보지 않고 장래의 가능성으로 보시는 분이십니다. 다 자란 나무를 보지 않고, 어린 나무이지만 자랐을 때 그 쓸모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새는 아버지로서 아들들의 속내를 누구보다도 잘 알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이새는 아들들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안 그런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세상 이목에 너무 민감합니다. 특별히 자녀 교육에는 더 그럽니다.
사도행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이렇게 시작하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 역시 인간의 편견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행 2장 22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바로 당신들이 죽인 예수는 큰 권능과 기적과 표적을 베푸시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임을 증거 하셨음에도, 당신들의 편견과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지 않았던가. 당신들은 그를 하찮게 보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메시아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는 그의 증인들이다.”
참으로 뼈아픈 지적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편견과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인해 완전히 무시되고, 배척되고,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신화 속에 있는 다윗은 장차 나타날 메시아의 표상으로 여기면서도, 그런 다윗까지도 기다렸던 메시아에 대해서는 무지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인간의 관점이란 이렇게 편견과 무지로 가득합니다. 백성들은 영광스런 다윗만을 생각했지, 그가 얼마나 무시된 가운데서 선택된 인물이었는가는 잊고 지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세상 풍조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리스도는) 뉘 자손이냐”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대답입니다.
“그야 당연히 다윗의 자손이지요.”
바로 이 대목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인 게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인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게 더 중요했습니다(마 1:18-25; 2:15; 3:17 등).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혈통이 중요했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인정이 더 중요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사람을 보는 관점과 예수께서 사람을 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릅니다. 이런 바리새인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매사를 보고, 판단하고, 삶의 목표로 삼는 일들이 얼마나 형편없겠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보는 관점도, 자식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도, 자식을 교육시키는 열정도 그 중심을 보기보다는 항상 ‘남과 비교해서 보는’ 세상 이목이 앞섭니다.
국정을 맡은 이들이 나라의 100년 앞은 고사하고, 자기 앞의 정적을 모두 없애버리기 위해 여론 조작할 생각만 합니다. 부모들은 자녀의 교육을 마치 부동산 투기를 하는 것처럼 합니다. 이제는 아예 자녀의 학력까지도 세습을 합니다. 신앙생활도 겉모습이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믿음 생활을 유행 따라서, 분위기에 따라서 철새처럼 옮겨 다니는 무리가 있습니다. 자기중심을 바르게 할 생각은 안 하고, 어디 가면 은혜가 차고 넘친다더라 하는 소문을 따라 다닙니다.
세상을 중심으로 본다는 것은 주체성을 지닌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아야 세상의 본질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외모가 아니라 마음을 가꿔야 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비록 모자랄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태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