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줄로 이끄시는 하나님 (호 11:1-4,8-9; 고전 1:26-31; 마 2:13-23) 2022. 12. 31. 밤 11시 송구영신 성만찬 기도회
호세아서는 주전 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 중동 일대를 호령하던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다메색을 꺾어 놓았고, 곁에 있는 강대국 애굽과 겨루느라 이스라엘을 압박할 여력이 없게 됩니다. 그리 되자 이스라엘은 모처럼 평온을 유지하면서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처럼의 번영은 이스라엘이 패망하는 요인이 됩니다. 당시 국제정세의 안정으로 무역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벼락부자들은 사치와 허영, 쾌락을 일삼았습니다. 여름별장 겨울별장을 짓고 호사스런 생활을 탐닉했습니다. 나라의 중추 기능을 하는 정치/법/종교가 3각 고리로 유착되어 썩을 대로 썩어서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밀어내고 바알 종교를 불러들였습니다. 절제와 미덕을 요구하는 야훼 보다는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바알이 더 좋았습니다. 호세아 6장 10절은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라고 합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 12부족 가운데 가장 큰 부족입니다. 이스라엘 12부족 모두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숭배를 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죽기 살기로 권력 다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주전 8세기 어간의 왕들이 열인데 하나같이 암살되거나 살해됐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는 6개월 만에 살룸에게 암살되고, 살룸은 므나헴에게 피살됩니다. 므나헴의 아들 브가야는 부하 장수 베가에 의해 암살되고, 베가는 호세아에 의해 암살됩니다. (이때가 남왕국 유다로서는 웃시아,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가 왕이 되던 때입니다.) 결국 북왕국 이스라엘은 호세아를 끝으로 앗시리아에 의해 종말을 맞이합니다(주전 722년).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보복만을 일삼은 지도층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마치 고뇌하듯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호 11:9).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중심의 사고에 철저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남달랐던 것은, 진리에 대한 순수성과 열정이 남달랐습니다. 그런 순수한 열정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전의 바울이 생각한 메시아는 십자가에 달리는 죄인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바울에게서 ‘속죄의 제물’로서의 메시아는 혁명 그 자체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 사건이 눈에 보이는 영광과 권위에 의해서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 세계에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내면의 순수함이 열림으로서 비로소 가능합니다. 예수 믿고 성공하는 걸 잘 믿는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공 신화에 취한 믿음입니다. 바울이 깨달은 믿음과는 반대인 것이지요. 참 신앙은 사람의 외모가 아닌 그 이면에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비단옷 입은 사람이냐 비단옷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느니라”(마 11:8-9).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에 의하면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육체”로 부르신 게 아닙니다. 육체란 무엇이겠습니까? 잠시 피었다 시들어버릴 것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겉모습입니다. 신분입니다. 사회적 지위입니다. ‘주께서는 세상에서 미련한 것들을 부르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셨으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시어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셨다. 그러니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은 육체를 자랑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있음을 자랑하라.’ 이 얼마나 역설적인 진리입니까? 성서가 말하는 진리가 단지 관념적인 것이었다면, 정신수양의 교훈은 될 수 있을지언정, 사회적으로 죽은 자와 같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출생 이야기 역시 우리로 하여금 겉모습이 아닌 그 이면을 보게 합니다. 예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헤롯의 칼을 피해 아직 핏덩이인 아기 예수를 강보에 싸서 이집트로 피난길을 떠납니다.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여전히 헤롯의 망령이 춤추는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가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갈릴리 나사렛 동네로 가게 되는데,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이때 어린 예수는 갈릴리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궁박했는지 몸으로 겪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마태는 이 모든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어떻게 이뤄지는 지를 깨달아 알게 합니다. 아기 예수께서는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계 한 복판에서 태어나서 자란 분입니다. 그 어디에도 그처럼 어린 생명에게 우호적인 세력이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신 것입니다. 헤롯은 태어난 메시아를 그토록 죽이려고 했음에도 결국은 자기가 먼저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고난의 땅이기도 하지만, 기근을 피할 수 있게 한 생명의 땅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집트가 아기 예수께는 헤롯의 칼을 피하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성서의 관점입니다.
한 해 마지막 시간입니다. 세상의 화려한 겉모습 이면에는 인간의 비열함과 고통이 있습니다. 저 옛날 북왕국 이스라엘의 호세아 시대처럼 인간의 타락이 극에 달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하셨을 기억합시다. 아무리 절망의 밤이 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심을 잊지 맙시다. 우리는 전쟁의 참화 가운데서도, 나라가 소멸될 위기 가운데서도, 다시 일어선 사람들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지만, 그러나 새로운 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줄로 이끌어 주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태영 목사)
사랑의 줄로 이끄시는 하나님 (호 11:1-4,8-9; 고전 1:26-31; 마 2:13-23) 2022. 12. 31. 밤 11시 송구영신 성만찬 기도회
호세아서는 주전 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 중동 일대를 호령하던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다메색을 꺾어 놓았고, 곁에 있는 강대국 애굽과 겨루느라 이스라엘을 압박할 여력이 없게 됩니다. 그리 되자 이스라엘은 모처럼 평온을 유지하면서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처럼의 번영은 이스라엘이 패망하는 요인이 됩니다. 당시 국제정세의 안정으로 무역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벼락부자들은 사치와 허영, 쾌락을 일삼았습니다. 여름별장 겨울별장을 짓고 호사스런 생활을 탐닉했습니다. 나라의 중추 기능을 하는 정치/법/종교가 3각 고리로 유착되어 썩을 대로 썩어서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밀어내고 바알 종교를 불러들였습니다. 절제와 미덕을 요구하는 야훼 보다는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바알이 더 좋았습니다. 호세아 6장 10절은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라고 합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 12부족 가운데 가장 큰 부족입니다. 이스라엘 12부족 모두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숭배를 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죽기 살기로 권력 다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주전 8세기 어간의 왕들이 열인데 하나같이 암살되거나 살해됐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는 6개월 만에 살룸에게 암살되고, 살룸은 므나헴에게 피살됩니다. 므나헴의 아들 브가야는 부하 장수 베가에 의해 암살되고, 베가는 호세아에 의해 암살됩니다. (이때가 남왕국 유다로서는 웃시아,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가 왕이 되던 때입니다.) 결국 북왕국 이스라엘은 호세아를 끝으로 앗시리아에 의해 종말을 맞이합니다(주전 722년).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보복만을 일삼은 지도층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마치 고뇌하듯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호 11:9).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중심의 사고에 철저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남달랐던 것은, 진리에 대한 순수성과 열정이 남달랐습니다. 그런 순수한 열정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전의 바울이 생각한 메시아는 십자가에 달리는 죄인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바울에게서 ‘속죄의 제물’로서의 메시아는 혁명 그 자체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 사건이 눈에 보이는 영광과 권위에 의해서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 세계에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내면의 순수함이 열림으로서 비로소 가능합니다. 예수 믿고 성공하는 걸 잘 믿는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공 신화에 취한 믿음입니다. 바울이 깨달은 믿음과는 반대인 것이지요. 참 신앙은 사람의 외모가 아닌 그 이면에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비단옷 입은 사람이냐 비단옷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느니라”(마 11:8-9).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에 의하면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육체”로 부르신 게 아닙니다. 육체란 무엇이겠습니까? 잠시 피었다 시들어버릴 것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겉모습입니다. 신분입니다. 사회적 지위입니다. ‘주께서는 세상에서 미련한 것들을 부르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셨으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시어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셨다. 그러니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은 육체를 자랑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있음을 자랑하라.’ 이 얼마나 역설적인 진리입니까? 성서가 말하는 진리가 단지 관념적인 것이었다면, 정신수양의 교훈은 될 수 있을지언정, 사회적으로 죽은 자와 같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출생 이야기 역시 우리로 하여금 겉모습이 아닌 그 이면을 보게 합니다. 예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헤롯의 칼을 피해 아직 핏덩이인 아기 예수를 강보에 싸서 이집트로 피난길을 떠납니다.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여전히 헤롯의 망령이 춤추는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가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갈릴리 나사렛 동네로 가게 되는데,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이때 어린 예수는 갈릴리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궁박했는지 몸으로 겪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마태는 이 모든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어떻게 이뤄지는 지를 깨달아 알게 합니다. 아기 예수께서는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계 한 복판에서 태어나서 자란 분입니다. 그 어디에도 그처럼 어린 생명에게 우호적인 세력이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신 것입니다. 헤롯은 태어난 메시아를 그토록 죽이려고 했음에도 결국은 자기가 먼저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고난의 땅이기도 하지만, 기근을 피할 수 있게 한 생명의 땅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집트가 아기 예수께는 헤롯의 칼을 피하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성서의 관점입니다.
한 해 마지막 시간입니다. 세상의 화려한 겉모습 이면에는 인간의 비열함과 고통이 있습니다. 저 옛날 북왕국 이스라엘의 호세아 시대처럼 인간의 타락이 극에 달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하셨을 기억합시다. 아무리 절망의 밤이 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심을 잊지 맙시다. 우리는 전쟁의 참화 가운데서도, 나라가 소멸될 위기 가운데서도, 다시 일어선 사람들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지만, 그러나 새로운 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줄로 이끌어 주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태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