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는 자신의 시온사상을 이렇게 펼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당시 바빌론에 유리되었던 예루살렘 거민들은 반세기 이상 지난 다음에야 겨우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자력으로 돌아온 게 아닌, 바빌론이 페르시아에게 멸망한 후 페르시아 고레스왕에 의해 돌아온 것입니다. 막상 와서 보니 현실은 너무나 암담했습니다. 정치는 극도로 부패하였고, 백성들은 삶의 중심을 잃고 방황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야말로 가난과 압제와 슬픔만이 가득한 한 밤중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낯빛이 밝을 까닭이 없었겠지요. 이사야는 바로 그런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으니”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본문 아래 6-7절 말씀은 허다한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나라에서 생산한 제물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제단에 바칠 때에 “내 집이 영화롭게 된다.”고 합니다. 그것들을 가져온 제물과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놀라운 장면입니다. 이게 이사야가 지닌 시온의 모습입니다. 이방인이라고 배척하지 말고, 세계만민을 향해 함께 어울려 살면서 평화의 빛을 비추라고 한 것입니다. 세계를 향해 열린 사고를 지니라는 것이지요.
이사야는 메시아 왕국을 또 이렇게 묘사하기도 합니다. “(메시아 왕국이 이뤄질)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사 11 ). 이리, 표범, 사자는 육식동물로 최상위 포식자입니다. 이렇게 포식자와 포식 당하는 연약한 존재들이 동무처럼 어울려 사는 세상을 이사야는 메시아 왕국으로 그린 것입니다. 연약한 백성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포식자는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황제요, 왕이요, 두령들입니다. 요즘 같으면 자본가요 최고 경영인도 포함되겠지요. 그게 바로 메시아 왕국이고, 민주화된 세상입니다.
마태가 전한 메시아의 탄생 소식 역시 ‘한 밤중’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태는 아기 예수께서 백성들에게 고통과 시련이 극에 달한 ‘헤롯 왕 때’ 때에 성령으로 잉태하였음을 증언합니다. 사람들은 ‘처녀 잉태’에 대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를 놓고 의문을 품기도 하고, 논쟁을 하기도 합니다. 처녀 출생을 ‘미혼모 출생’으로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처녀출생 즉 ‘성령 잉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의 때에 하나님께서 희망과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빛을 받아 사는 사람들은 초등학문 수준의 율법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고 합니다. 율법과 복음은 인간에 대한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율법은 인간을 타율적인 존재로 여깁니다. 일일이 가르치고, 감독해야 할 미숙한 존재로 여깁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존재,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을 ‘자녀(상속자)’ 즉 ‘자유인’으로 존중합니다. 율법은 인간을 의심의 눈초리로 감시하고, 규정하나, 복음은 믿고 기대합니다.
성탄절은 오시는 그분이 세울 메시아 왕국을 더욱 명료하게 밝히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포식자와 어린 아이가 동무가 되어 함께 어울린다는 이사야 이야기처럼, 성탄 이야기가 사실이든 허구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탄의 복음은 아무리 칠흑처럼 어두운 밤일지라도 희망을 지니게 한다는 게 더 중요합니다. 복음은 비록 가난할지라도 희망을 품고 살게 합니다. 눈앞의 난관을 모면하기 위해서 노예처럼 살지 말라고 합니다. 고단한 가운데서도 우리 앞에 비추는 메시아 왕국의 빛을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 아멘.
(하태영 목사)
이사야는 자신의 시온사상을 이렇게 펼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당시 바빌론에 유리되었던 예루살렘 거민들은 반세기 이상 지난 다음에야 겨우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자력으로 돌아온 게 아닌, 바빌론이 페르시아에게 멸망한 후 페르시아 고레스왕에 의해 돌아온 것입니다. 막상 와서 보니 현실은 너무나 암담했습니다. 정치는 극도로 부패하였고, 백성들은 삶의 중심을 잃고 방황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야말로 가난과 압제와 슬픔만이 가득한 한 밤중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낯빛이 밝을 까닭이 없었겠지요. 이사야는 바로 그런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으니”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본문 아래 6-7절 말씀은 허다한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나라에서 생산한 제물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제단에 바칠 때에 “내 집이 영화롭게 된다.”고 합니다. 그것들을 가져온 제물과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놀라운 장면입니다. 이게 이사야가 지닌 시온의 모습입니다. 이방인이라고 배척하지 말고, 세계만민을 향해 함께 어울려 살면서 평화의 빛을 비추라고 한 것입니다. 세계를 향해 열린 사고를 지니라는 것이지요.
이사야는 메시아 왕국을 또 이렇게 묘사하기도 합니다. “(메시아 왕국이 이뤄질)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사 11 ). 이리, 표범, 사자는 육식동물로 최상위 포식자입니다. 이렇게 포식자와 포식 당하는 연약한 존재들이 동무처럼 어울려 사는 세상을 이사야는 메시아 왕국으로 그린 것입니다. 연약한 백성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포식자는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황제요, 왕이요, 두령들입니다. 요즘 같으면 자본가요 최고 경영인도 포함되겠지요. 그게 바로 메시아 왕국이고, 민주화된 세상입니다.
마태가 전한 메시아의 탄생 소식 역시 ‘한 밤중’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태는 아기 예수께서 백성들에게 고통과 시련이 극에 달한 ‘헤롯 왕 때’ 때에 성령으로 잉태하였음을 증언합니다. 사람들은 ‘처녀 잉태’에 대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를 놓고 의문을 품기도 하고, 논쟁을 하기도 합니다. 처녀 출생을 ‘미혼모 출생’으로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처녀출생 즉 ‘성령 잉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의 때에 하나님께서 희망과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빛을 받아 사는 사람들은 초등학문 수준의 율법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고 합니다. 율법과 복음은 인간에 대한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율법은 인간을 타율적인 존재로 여깁니다. 일일이 가르치고, 감독해야 할 미숙한 존재로 여깁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존재,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을 ‘자녀(상속자)’ 즉 ‘자유인’으로 존중합니다. 율법은 인간을 의심의 눈초리로 감시하고, 규정하나, 복음은 믿고 기대합니다.
성탄절은 오시는 그분이 세울 메시아 왕국을 더욱 명료하게 밝히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포식자와 어린 아이가 동무가 되어 함께 어울린다는 이사야 이야기처럼, 성탄 이야기가 사실이든 허구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탄의 복음은 아무리 칠흑처럼 어두운 밤일지라도 희망을 지니게 한다는 게 더 중요합니다. 복음은 비록 가난할지라도 희망을 품고 살게 합니다. 눈앞의 난관을 모면하기 위해서 노예처럼 살지 말라고 합니다. 고단한 가운데서도 우리 앞에 비추는 메시아 왕국의 빛을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 아멘.
(하태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