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말씀은,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드린 기도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솔로몬의 기도 가운데 성전을 이중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이라는 작은 공간에 머물러 계실 분이 아닌 초월적인 분으로 말하면서 동시에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처소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7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27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께서 땅 위에 계시기를, 우리가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성전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 28 그러나 주 나의 하나님, 주의 종이 드리는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오늘 주의 종이 주 앞에서 부르짖으면서 드리는 이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29 주께서 밤낮으로 눈을 뜨시고, 이 성전을 살펴 주십시오. 이 곳은 주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곳입니다. 주의 종이 이 곳을 바라보면서 기도할 때에, 이 종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성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신 곳’, 유대인의 어법에 의하면 ‘이름’이란 단순한 ‘기호’로서의 이름이 아닌 ‘존재’를 지칭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인 셈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이사 들어 사신다면, 하나님은 그 작은 공간에 예속되는 분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하여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땅 위에 계시기를, 우리가 어찌 바라겠습니까?”라고 세상의 흥망성쇠와 함께,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이 낡거나 파괴되거나 더럽힘을 당할지라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는 손상을 입지 않으시는 분임을 명시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여러 차례 더럽힘을 당하고, 파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함에도 초월하신 하나님은 시·공간을 뛰어 넘어 당신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성전에 머무시는 분이시라는 생각이 저 옛날 솔로몬의 기도 가운데 나타나 있다는 게 놀라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후대로 내려와 유대교가 교조적으로 변하면서 하나님의 초월성은 사라지고, 성전 안에만 계시는 분으로 여기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저들은 하나님을 성전 안에 포박시켜놓고, 주인 행세를 하며 인간을 억압한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앞뒤가 꽉 막힌 시대에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유대교의 의식 가운데 예루살렘성전 안에 묶여 계시던 하나님께서 마침내 예수를 통해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바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놀라운 말을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생각 자체를 상상할 수 없는 시대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성전은 예루살렘성전 외에 달리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성전에 가야합니다. 이것이 당시 사람들의 뇌수에 박힌 진리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일 뿐 아니라, 성전에 대한 개념 자체를 뒤바꾸는 언설이기도 합니다. 개혁의 표식으로 치자면 이보다 더 래디칼한 표현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사도 바울만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마태 역시 은유적이지만 강력하게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마 27:51) 라고 “예루살렘성전”이라는 배타적 질서가 무너진 것을 선언했습니다. 마침내 요한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사실상 예루살렘성전의 해체를 선언한 발언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형성된 그리스도공동체는 예루살렘성전 중심의 종교에 대해 마치 융단폭격을 하듯 성전을 해체시키고, 인간의 삶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으로 말한 것입니다. 마태 18장 20절에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형제자매들의 공동체로, 그 자체가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를 세우셨지, 돌로 지은 성전을 세우신 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12장 전체가 예수께서 유대교 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인 내용 하나하나가 당시 유대교로서는 경천동지할 내용들입니다.
6절. 당신이 성전보다 더 크다고 하십니다.
14절. 당신이 신화적인 존재인 요나보다 더 크다고 하십니다.
43절. 당신이 솔로몬보다 더 크다고 하십니다.
안식일 논쟁에서도 예수께서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선언하심으로서 유대교와 타협할 수 없는 길에 들어섭니다. 우리는 이 안식일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성육신하신 분의 임재 방식입니다.
성육신하신 분은 성전이든, 안식일이든, 율법이든, 계명이든, 그것들을 초월하십니다. 성육신하신 분은, 스스로 자유하는 분이시고, 창조하는 분이시고, 구속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고난을 향해 나아갔다는 것, 죽음을 향해 나아갔다는 것은, 고난도 죽음도 그분을 삼키지 못하는 자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근원을 향한 감사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잠시 불편함을 벗어나고, 배고픔을 모면하고,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꿈을 향해 나아가고, 사랑하는 가족과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들에 대해 분명 감사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삶의 근원 역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존재론적인 감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감사는 자기 충족적인 감사이고, 비교되는 감사이지만,
‘존재론적인 감사’는 모든 조건들을 뛰어 넘는 감사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수시로 변합니다. 일상에 매달리는 감사는 쉽게 낙심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아침에는 감사했던 일이, 저녁이면 불평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삶의 근원에 대한 감사 없이 일상의 변화에만 민감하면, 그런 감사는 아침저녁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우리 안에 성육신하신 분, 영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유케 하시며, 우리 자신을 성소가 되게 하시는 분을 향한 감사여야 합니다. 하루하루 소소하지만 행복을 가꾸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만, 동시에 죄와 죽음의 공포로 가득한 세상에서 구속의 은총을 베푸시는 주님을 향해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일상의 감사를 뛰어넘는 삶의 근원을 향한 감사입니다.
(하태영 목사)
구약의 말씀은,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드린 기도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솔로몬의 기도 가운데 성전을 이중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이라는 작은 공간에 머물러 계실 분이 아닌 초월적인 분으로 말하면서 동시에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처소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7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27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께서 땅 위에 계시기를, 우리가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성전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 28 그러나 주 나의 하나님, 주의 종이 드리는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오늘 주의 종이 주 앞에서 부르짖으면서 드리는 이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29 주께서 밤낮으로 눈을 뜨시고, 이 성전을 살펴 주십시오. 이 곳은 주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곳입니다. 주의 종이 이 곳을 바라보면서 기도할 때에, 이 종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성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신 곳’, 유대인의 어법에 의하면 ‘이름’이란 단순한 ‘기호’로서의 이름이 아닌 ‘존재’를 지칭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인 셈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이사 들어 사신다면, 하나님은 그 작은 공간에 예속되는 분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하여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땅 위에 계시기를, 우리가 어찌 바라겠습니까?”라고 세상의 흥망성쇠와 함께,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이 낡거나 파괴되거나 더럽힘을 당할지라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는 손상을 입지 않으시는 분임을 명시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여러 차례 더럽힘을 당하고, 파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함에도 초월하신 하나님은 시·공간을 뛰어 넘어 당신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성전에 머무시는 분이시라는 생각이 저 옛날 솔로몬의 기도 가운데 나타나 있다는 게 놀라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후대로 내려와 유대교가 교조적으로 변하면서 하나님의 초월성은 사라지고, 성전 안에만 계시는 분으로 여기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저들은 하나님을 성전 안에 포박시켜놓고, 주인 행세를 하며 인간을 억압한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앞뒤가 꽉 막힌 시대에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유대교의 의식 가운데 예루살렘성전 안에 묶여 계시던 하나님께서 마침내 예수를 통해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바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놀라운 말을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생각 자체를 상상할 수 없는 시대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성전은 예루살렘성전 외에 달리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성전에 가야합니다. 이것이 당시 사람들의 뇌수에 박힌 진리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일 뿐 아니라, 성전에 대한 개념 자체를 뒤바꾸는 언설이기도 합니다. 개혁의 표식으로 치자면 이보다 더 래디칼한 표현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사도 바울만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마태 역시 은유적이지만 강력하게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마 27:51) 라고 “예루살렘성전”이라는 배타적 질서가 무너진 것을 선언했습니다. 마침내 요한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사실상 예루살렘성전의 해체를 선언한 발언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형성된 그리스도공동체는 예루살렘성전 중심의 종교에 대해 마치 융단폭격을 하듯 성전을 해체시키고, 인간의 삶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으로 말한 것입니다. 마태 18장 20절에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형제자매들의 공동체로, 그 자체가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를 세우셨지, 돌로 지은 성전을 세우신 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12장 전체가 예수께서 유대교 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인 내용 하나하나가 당시 유대교로서는 경천동지할 내용들입니다.
6절. 당신이 성전보다 더 크다고 하십니다.
14절. 당신이 신화적인 존재인 요나보다 더 크다고 하십니다.
43절. 당신이 솔로몬보다 더 크다고 하십니다.
안식일 논쟁에서도 예수께서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선언하심으로서 유대교와 타협할 수 없는 길에 들어섭니다. 우리는 이 안식일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성육신하신 분의 임재 방식입니다.
성육신하신 분은 성전이든, 안식일이든, 율법이든, 계명이든, 그것들을 초월하십니다. 성육신하신 분은, 스스로 자유하는 분이시고, 창조하는 분이시고, 구속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고난을 향해 나아갔다는 것, 죽음을 향해 나아갔다는 것은, 고난도 죽음도 그분을 삼키지 못하는 자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근원을 향한 감사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잠시 불편함을 벗어나고, 배고픔을 모면하고,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꿈을 향해 나아가고, 사랑하는 가족과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들에 대해 분명 감사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삶의 근원 역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존재론적인 감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감사는 자기 충족적인 감사이고, 비교되는 감사이지만,
‘존재론적인 감사’는 모든 조건들을 뛰어 넘는 감사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수시로 변합니다. 일상에 매달리는 감사는 쉽게 낙심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아침에는 감사했던 일이, 저녁이면 불평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삶의 근원에 대한 감사 없이 일상의 변화에만 민감하면, 그런 감사는 아침저녁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우리 안에 성육신하신 분, 영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유케 하시며, 우리 자신을 성소가 되게 하시는 분을 향한 감사여야 합니다. 하루하루 소소하지만 행복을 가꾸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만, 동시에 죄와 죽음의 공포로 가득한 세상에서 구속의 은총을 베푸시는 주님을 향해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일상의 감사를 뛰어넘는 삶의 근원을 향한 감사입니다.
(하태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