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 요한의 제자들 사이에 미묘한 긴장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상대의 스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지가 궁금했고, 어느 쪽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인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주일에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해 하신 말씀을 통해서 세계관, 신앙관, 라이프 스타일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세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생각이 드러나 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3:29). 요한은 자신을 오실 분의 들러리로 여기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혼인 풍속에서; 신랑의 들러리는 신부를 마지막까지 보호하고, 마침내 신부를 신랑에게 넘겨줄 때의 기쁨 이루 형언할 수 없다고 합니다. 복음서가 이 이야기를 기술한 것은 예수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임을 밝히려는 의도이지만, 이 세례 요한의 증언에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마음에 새겨야 할 소중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요3:30): 주님은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그때 비로소 나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흥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쇠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히브리서를 통해서 좀더 상세히 살펴봅니다. 히브리서 본문은 먼저, ‘시내산’과 ‘시온산’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시내산은 율법적인 세상의 정상을, 시온산은 복음적인 세상의 정상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시내산은 어둠, 두려움, 접근 불가능성을 드러냅니다. 시온산은 하늘의 예루살렘, 완성된 교회, 누구에게나 개방된 세상을 드러냅니다. 다음으로, ‘아벨의 피’와 ‘예수의 피’를 대조합니다. 아벨의 피는 살해당한 자의 피, 원한을 지닌 피, 복수하는 피입니다. 예수의 피는 속죄의 피, 화해의 피, 사랑의 피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벨의 억울한 피로 인한 복수의 악순환을 단절하고, 사랑과 화해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아벨의 피와 예수의 피는 결코 섞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히12:22): 그리스도인은 아벨의 피가 들끓는 세상의 자리에서 돌이켜서, 예수의 피로 가꾸는 세상의 자리에 들어온 이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앉고싶어하는 삶의 자리; 그 목적지는 권세의 자리도 아니고, 성공한 사람들의 자리도 아니고, 부자들이 모여 사는 자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새 예루살렘입니다. 시온산입니다. 새롭게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새로운 세상의 중심부에 예수께서 자리하고 계십니다. 예수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세상은 영원한 나라를 향한 출발지일 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종말신앙, 종말론적 역사관, 종말론적 공동체(교회) 라고 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큰 공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 업적을 누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랑은 하되 집착은 말아야 합니다.
예언자(이사야)의 말씀처럼 세상은 언제나 심판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 나라들의 강대함에 주눅들고, 변절하고, 배반을 일삼습니다. 세속의 성공과 열망을 좇아 다니느라 갈대처럼 흔들립니다. 우리는 쇠할 수밖에 없는 세상 나라로 인해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나라가 쇠함으로서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된다는 것은 기독교 종말신앙이 지닌 독특한 역사관입니다. 이번 주, 누가 대통령이 ‘되고-안 되고’를 떠나서 세상 나라는 심판 아래 놓여 있음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으로 충만할 때가 진정으로 세상은 살맛 나는 곳이 됩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 요한의 제자들 사이에 미묘한 긴장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상대의 스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지가 궁금했고, 어느 쪽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인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주일에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해 하신 말씀을 통해서 세계관, 신앙관, 라이프 스타일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세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생각이 드러나 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3:29). 요한은 자신을 오실 분의 들러리로 여기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혼인 풍속에서; 신랑의 들러리는 신부를 마지막까지 보호하고, 마침내 신부를 신랑에게 넘겨줄 때의 기쁨 이루 형언할 수 없다고 합니다. 복음서가 이 이야기를 기술한 것은 예수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임을 밝히려는 의도이지만, 이 세례 요한의 증언에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마음에 새겨야 할 소중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요3:30): 주님은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그때 비로소 나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흥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쇠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히브리서를 통해서 좀더 상세히 살펴봅니다. 히브리서 본문은 먼저, ‘시내산’과 ‘시온산’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시내산은 율법적인 세상의 정상을, 시온산은 복음적인 세상의 정상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시내산은 어둠, 두려움, 접근 불가능성을 드러냅니다. 시온산은 하늘의 예루살렘, 완성된 교회, 누구에게나 개방된 세상을 드러냅니다. 다음으로, ‘아벨의 피’와 ‘예수의 피’를 대조합니다. 아벨의 피는 살해당한 자의 피, 원한을 지닌 피, 복수하는 피입니다. 예수의 피는 속죄의 피, 화해의 피, 사랑의 피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벨의 억울한 피로 인한 복수의 악순환을 단절하고, 사랑과 화해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아벨의 피와 예수의 피는 결코 섞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히12:22): 그리스도인은 아벨의 피가 들끓는 세상의 자리에서 돌이켜서, 예수의 피로 가꾸는 세상의 자리에 들어온 이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앉고싶어하는 삶의 자리; 그 목적지는 권세의 자리도 아니고, 성공한 사람들의 자리도 아니고, 부자들이 모여 사는 자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새 예루살렘입니다. 시온산입니다. 새롭게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새로운 세상의 중심부에 예수께서 자리하고 계십니다. 예수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세상은 영원한 나라를 향한 출발지일 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종말신앙, 종말론적 역사관, 종말론적 공동체(교회) 라고 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큰 공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 업적을 누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랑은 하되 집착은 말아야 합니다.
예언자(이사야)의 말씀처럼 세상은 언제나 심판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 나라들의 강대함에 주눅들고, 변절하고, 배반을 일삼습니다. 세속의 성공과 열망을 좇아 다니느라 갈대처럼 흔들립니다. 우리는 쇠할 수밖에 없는 세상 나라로 인해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나라가 쇠함으로서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된다는 것은 기독교 종말신앙이 지닌 독특한 역사관입니다. 이번 주, 누가 대통령이 ‘되고-안 되고’를 떠나서 세상 나라는 심판 아래 놓여 있음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으로 충만할 때가 진정으로 세상은 살맛 나는 곳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