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라(슥9:9-12; 벧전3:13-22; 마21:1-13 / 07.11.25)
한국기독교장로회 삼일교회
03381 서울특별시 은평구 녹번로 44-2 (녹번동)
연락처 : 02-386-6257 │이메일 : samilchprok@gmail.com
Copyright 2024. 삼일교회 all rights reserved.
한국기독교장로회 삼일교회
03381 서울특별시 은평구 녹번로 44-2 (녹번동)
연락처 : 02-386-6257 │이메일 : samilchprok@gmail.com
Copyright 2024. 삼일교회 all rights reserved.
스가랴 당시 이스라엘은, 겸손하여서 나귀를 나고 오시는 평화의 왕을 갈망하였습니다. 본문에서 “겸손하다”는 말은 본디 “가난하다”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진정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분은 큰 위엄을 지녔음에도 스스로 가난해지시고, 낮아지심에서 찾은 게 예언자가 상상했던 평화의 왕입니다. 짐을 나르는 나귀에 대해서도 신학자들은 대체로 전쟁에 쓰는 말(軍馬)과 대비되는 평화의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탈무드 학자들은 나귀보다 나귀를 타는 이의 관점에서 겸손의 상징으로 해석했습니다. 실제로 고대 애굽에서 유대인들은 자신을 회교도보다 낮추기 위해서 나귀를 탔다고 합니다. 스가랴의 메시아 이미지는 명백한 역사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경과 절뚝발이를 사정없이 죽이면서 예루살렘을 점령했던 정복자 다윗에 대한 기억입니다.
마태에게서 스가랴의 열망은 예수로 인해 성취되고 있습니다. 다윗과 달리 예수께서는 맹인과 절뚝발이를 고쳐주는 치유자로, 가난한 자를 어루만지는 위로자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시는 생명의 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나귀 타고 오신 분이 성전 경내에서 성전을 숙청하는 사건을 벌이고 있습니다(마21:12-13).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지성소입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성전에 대한 제의적인 성격을 배제하고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해서(사56:7)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패한 종교를 혁파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과 영적 교재를 나누는 처소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신앙 생활의 한 형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상상력에 대한 개방입니다. 현실에서 불가능을 기도는 가능하게 합니다. 현실은 기도를 요청하지 않고, 치밀한 계산과 기술과 자본과 열정을 요청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힘없는 사람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세속적인 열정의 한계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영적인 정열입니다. 그리하여 기도는 창조 세계의 놀라운 상상력과 구원의 신비로 인도합니다. 기도가 없는 사람은 상상력이 고갈되어 삶의 활력을 잃고 고집과 독선만이 남습니다.
서신은 노아 시대, 물로부터의 구원을 세례의 모형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벧전3:21)고. 세례는 개인적으로 회개를 수반하는 것이고, 공동체적으로는 인류의 파멸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세속의 욕구들, 물질 중심의 번영에 대해 선을 긋고 하나님의 인류 번영 사역에 가담하는 행위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지금 쉴새없이 ‘변화’를 강조합니다. 스타일을 바꾸고, 이미지를 바꾸고, 환경을 바꾸고, 제도를 바꾸고, 모델을 바꾸고, 조직을 바꾸고, 체질을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그 어디에도 회개와 같은 구원의 경험; 놀라움, 경외심, 기쁨과 같은 초월적인 경험은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교회에서 ‘회개’라는 말은 세속의 ‘변화’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변화는 침몰하는 배에서 서로가 자기만 살겠다고 남을 밀어내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돌이켜 보면 인류는 자기를 변화시키지 못해서 멸망의 위기를 맞이하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상상력의 결핍으로 인해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지금 눈앞의 세계가 아닌 전혀 다른 세계를 꿈꾸고 상상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내 심령 가운데서 회개가 사라진다는 것은 내 앞의 상상력의 무지개가 사라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삶의 경외심이 사라진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기능적인 변화에만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본질적인 변화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