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그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합이 심판받은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닙니다. 아직도 아합의 아들들과 이세벨이 악행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아합 시대의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가 이세벨과 대결하며, 고군분투했습니다. 때가 되어 엘리사는 야훼 하나님께로부터 이세벨에게 최후 심판을 전하도록 소명을 받습니다. 엘리사는 문하의 생도에게 전선에 나가 있는 장수 예후를 찾아가서 전격적으로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라고 합니다. 혁명을 일으키도록 한 것이지요.
새로운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예후는 지체하지 않고 혁명을 개시합니다. 다급하게 된 요람은 도망치다 예후의 화살에 맞아 죽고, 이세벨은 감히 누가 내게 도전하느냐며 위엄을 갖추고 궁궐 창문으로 요람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내시들이 이세벨을 들어서 성벽으로 던져버립니다. 설화자는 이 참혹한 장면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 여자를 아래로 내던지니, 피가 벽과 말에게까지 튀었다. 예후가 탄 말이 그 여자의 주검을 밟고 지나갔다.”(왕하 9:32-33) 이세벨의 남편 아합의 주검은 창기들이 목욕하는 데서 씻고, 개들이 그 피를 핥았는데, 이세벨의 주검은 아예 개들이 먹었습니다. 성경은 이 끔직한 장면을 순화시키거나,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참혹한 일은 일어났습니다. 이왕 일어난 일이라면 용기를 가지고 들여다보고, 후대에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의 소명입니다.
자기 나라의 역사를 미화시키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고약한 일들은 없던 걸로 만들거나, 변조시키거나, 미화시키는 일을 합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국의 역사를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록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는 건 아닙니다. 성경은 자기 역사를 감추는 행위를 비겁한 일로 여깁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정면으로 보게 함으로써,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깨달아 알게 합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참혹한 말로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되묻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겨 봅니다.
바울이 말하는 몸은 삶을 이뤄가는 실체로서의 몸입니다. 우리의 삶은 몸에 의해서 이뤄집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생각하고, 말하고, 욕망하고, 일하고, 잠자고, 놀고 하는 모든 것이 몸의 활동입니다. 믿음은 몸에 의해서 구현됩니다. 몸과 유리된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바울은 바로 그런 몸은 내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계신 전’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할 몸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20)고 합니다. 바울은 몸을 우리 자신의 인격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몸을 절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몸은 한시적이고, 생로병사의 필연 가운데 있으며, 세계 환경과 소통하며 살아야 할 대상입니다. 내 몸이 건강하기 위해서 주변 세계는 물론 나 아닌 다른 몸의 건강도 돌봐야 합니다.
몸의 행위와 관련하여 유대인들은 자선을 의로운 행위로 여겼습니다. 싫어도 의무로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 즉 자선을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의로운 행위에 대한 물질적인 보상보다 정신적인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신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은 그러해야 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그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합이 심판받은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닙니다. 아직도 아합의 아들들과 이세벨이 악행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아합 시대의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가 이세벨과 대결하며, 고군분투했습니다. 때가 되어 엘리사는 야훼 하나님께로부터 이세벨에게 최후 심판을 전하도록 소명을 받습니다. 엘리사는 문하의 생도에게 전선에 나가 있는 장수 예후를 찾아가서 전격적으로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라고 합니다. 혁명을 일으키도록 한 것이지요.
새로운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예후는 지체하지 않고 혁명을 개시합니다. 다급하게 된 요람은 도망치다 예후의 화살에 맞아 죽고, 이세벨은 감히 누가 내게 도전하느냐며 위엄을 갖추고 궁궐 창문으로 요람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내시들이 이세벨을 들어서 성벽으로 던져버립니다. 설화자는 이 참혹한 장면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 여자를 아래로 내던지니, 피가 벽과 말에게까지 튀었다. 예후가 탄 말이 그 여자의 주검을 밟고 지나갔다.”(왕하 9:32-33) 이세벨의 남편 아합의 주검은 창기들이 목욕하는 데서 씻고, 개들이 그 피를 핥았는데, 이세벨의 주검은 아예 개들이 먹었습니다. 성경은 이 끔직한 장면을 순화시키거나,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참혹한 일은 일어났습니다. 이왕 일어난 일이라면 용기를 가지고 들여다보고, 후대에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의 소명입니다.
자기 나라의 역사를 미화시키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고약한 일들은 없던 걸로 만들거나, 변조시키거나, 미화시키는 일을 합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국의 역사를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록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는 건 아닙니다. 성경은 자기 역사를 감추는 행위를 비겁한 일로 여깁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정면으로 보게 함으로써,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깨달아 알게 합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참혹한 말로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되묻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겨 봅니다.
바울이 말하는 몸은 삶을 이뤄가는 실체로서의 몸입니다. 우리의 삶은 몸에 의해서 이뤄집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생각하고, 말하고, 욕망하고, 일하고, 잠자고, 놀고 하는 모든 것이 몸의 활동입니다. 믿음은 몸에 의해서 구현됩니다. 몸과 유리된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바울은 바로 그런 몸은 내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계신 전’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할 몸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20)고 합니다. 바울은 몸을 우리 자신의 인격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몸을 절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몸은 한시적이고, 생로병사의 필연 가운데 있으며, 세계 환경과 소통하며 살아야 할 대상입니다. 내 몸이 건강하기 위해서 주변 세계는 물론 나 아닌 다른 몸의 건강도 돌봐야 합니다.
몸의 행위와 관련하여 유대인들은 자선을 의로운 행위로 여겼습니다. 싫어도 의무로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 즉 자선을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의로운 행위에 대한 물질적인 보상보다 정신적인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신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은 그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