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스 5:1-6; 계 15:1-4; 마 14: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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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경제논리와 성만찬)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바빌론은 신흥 페르시아에 의해 맥없이 무너졌습니다. 중동의 새로운 강자가 된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바빌론 치하의 유대인 포로들을 조국으로 귀환하는 걸 허락하고, 바빌론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하도록 했습니다.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무려 70여년 이상 바빌론에 억류 생활을 하던 이들이 그곳의 안정된 삶의 터를 뒤로 하고 또 다시 귀향의 고생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은 이들과, 성경 연구에 일생을 바친 에스라와 같은 지도자들의 피눈물 나는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북송 재일동포의 자녀로 탈북해서 일본에 정착한 다카야스 라는 여성의 기사를 본 일이 있습니다. 그녀는 북한에서 자란 18년이 자신을 성장하게 한 밑거름이 됐다고 했습니다. 북한에서의 삶이 유복해서가 아니라, 자유를 박탈당하고,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겨야 했지만, 그 같은 역경을 견뎌낸 삶이 오늘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빌론 포로생활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불행한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재탄생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계시록의 환상이 보여주는 장면도 그와 다를 바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칠흑처럼 어두운 암흑기에 하나님의 영광은 반듯이 드러날 것을 믿은 사람입니다. 요한의 믿음이 환상으로 표현된 것은, 그 시대가 자기 서사의 언어를 모두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절망과 죽음만이 지배하는 시대였던 것이지요. 환상들은 모두 어린양 예수께서 악한 권세를 심판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장면은 바로 최후의 승리자들이 부르는 ‘모세의 노래’(출 15:1-18)입니다. 이 노래의 특징이 있습니다. 인간의 승리와 공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서 ‘하늘’은 자신의 존재와 공적을 잊게 하고, 오직 하나님의 위대하심만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죄악으로 인해 형성된 자아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이름만을 드높이는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어떻습니까? 마태는 이 이야기를 세례 요한이 참수된 뒤에 배치했습니다. 기적 아니고는 살 수 없는 무리의 절망을 희망으로 해석한 게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때문에 이 기적은 인간의 절대적인 무능을 드러냄과 동시에 복음의 능력을 증거합니다. 지금 있는 곳은 빈 들이고, 때는 이미 저물었습니다. 제자들은 무리에게 스스로 배고픔을 해결하도록 제안합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짐작이 됩니다. 만일 복음이 비단결처럼 포근하고, 산해진미처럼 달콤하다면 그건 복음이 아닐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당황스러움으로 다가옵니다.
오병이어 기적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합니다. 이는 희망이 없는 시대에 제자들에게 부가된 요청입니다. 제자들에게 암울한 세상은 복음의 빛을 드러낼 소명이 부가됩니다. 우리 시대의 절망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성만찬의 실현으로 표현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빈부격차 해소를 통한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고,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정치논리 혹은 경제논리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그리스도의 자기 공여인 성만찬적인 해법에 주목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