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10일 주일예배
부활절 여섯째 주일 ‧ 어버이주일
신 34:1-8; 행 1:1-11; 요 16:1-15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칭하셨습니다(요 16:7).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란 ‘곁에 있도록 부름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헬라 시대에 변호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위기의 순간에 도움을 주기 위해 곁에 서고, 올바른 조언으로 유죄 판결을 피할 수 있도록 돕고, 당사자를 대신해 갈등을 중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으리라”(행 1:8)는 사도행전의 말씀이 막힘 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성령의 역동성을 떠올리게 한다면, 요한복음은 위기에 처한 제자들 곁에 머무시며, 구체적인 도움과 위로를 베푸시는 성령의 세밀한 역사를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나라 개신교 전래 초기의 신앙인들 가운데 요한복음을 좋아한 분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극심한 가난과 엄혹한 시대 상황을 견뎌야 했던 분들이 요한복음을 통해 깊은 위안을 얻었다는 뜻으로 기억합니다. 요한복음이 전해주는 보혜사 성령의 은총에 대한 주님의 말씀 앞에서, 왜 요한복음에서 깊은 위안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분들이 많은지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주님이 언급하신 ‘출교’(ἀποσυνάγωγος, ‘회당에서 쫓아냄’)라는 단어는 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에만 나오며, 유대교의 기독교인 박해와 직접 연관되어 있습니다(요 16:2).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 군대에 의해 파괴된 후 유대교는 성전 중심에서 회당 중심의 랍비 유대교로 재편되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유대교는 평일 기도문에 이단자와 배교자를 저주하는 기도문을 추가했습니다. 이 기도문이 회당 예배에서 낭독될 때,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자신을 저주하는 이 기도에 아멘을 할 수 없었고, 그러면 정체가 드러나 회당에서 쫓겨나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당시 출교는 단순히 회당에 들어가지 못하는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가족 공동체에서도 쫓겨나고, 모든 사회적 관계를 상실하며, 때로는 죽음의 위협까지 받는 일이었습니다. 박해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는 최대치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도움이 있고 없고의 차이에 따라 목숨을 지킬 수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이 성령에 대해 특별히 깊은 이해와 진술을 담고 있는 것은, 요한복음 공동체가 겪어야 했던 박해의 고난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공동체가 보존한 성령에 대한 말씀은 그 공동체가 경험한 보혜사 성령의 흔적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박해 받는 제자들 곁에 머무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성령 사이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텐데, 이는 성령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려 깊은 인도와 보살핌을 동일하게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4)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성령에 대한 이와 같은 말씀은 요한복음 공동체의 특성을 보여주며, 나아가 교회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을 고발하고 죽이려 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그들을 향해 아무런 적개심도 보이지 않는 교회의 모습은 주님으로부터 와서 제자들 곁에 머무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제자들을 출교시키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당치도 않은 이유로 제자들을 죽일 것을 내다보시면서, 그것은 “그들이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6:3). 이는 박해자들을 비난하거나, 그들의 폭력적인 행동을 정죄하는 말씀으로는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한계와 무지를 안타깝게 여기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공동체가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았던 주님의 그 마음을 성령이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박해 받는 교회 안에서 박해자들을 향한 적개심이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교회가 성령의 보살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고발할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이들의 차가운 시선 앞에서 순결한 눈빛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 이런 이들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정말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신비라고밖엔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고난 가운데서도 혹독해지지 않고 더 선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로 존재합니다. 도로테 죌레(Dorothee Sölle)가 말한 것처럼, 그런 이들에게서는 세상을 위로하는 힘이 흘러나옵니다. ‘그것은 성인(聖人)들의 위로다’라는 표현은 사태의 중심을 파악하고 있는 이의 경외심이 담긴 고백이라 할 것입니다(『고난』 229). 연약한 사람들에게서, 위기에 처한 작은 공동체로부터 ‘거룩한 위로’가 흘러나올 수 있다는 말이 과한 말처럼 들리시는지요? 아닙니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습니다. 성령이 그들 곁에 머무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들에게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오호영 목사)
2026년 5월 10일 주일예배
부활절 여섯째 주일 ‧ 어버이주일
신 34:1-8; 행 1:1-11; 요 16:1-15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칭하셨습니다(요 16:7).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란 ‘곁에 있도록 부름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헬라 시대에 변호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위기의 순간에 도움을 주기 위해 곁에 서고, 올바른 조언으로 유죄 판결을 피할 수 있도록 돕고, 당사자를 대신해 갈등을 중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으리라”(행 1:8)는 사도행전의 말씀이 막힘 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성령의 역동성을 떠올리게 한다면, 요한복음은 위기에 처한 제자들 곁에 머무시며, 구체적인 도움과 위로를 베푸시는 성령의 세밀한 역사를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나라 개신교 전래 초기의 신앙인들 가운데 요한복음을 좋아한 분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극심한 가난과 엄혹한 시대 상황을 견뎌야 했던 분들이 요한복음을 통해 깊은 위안을 얻었다는 뜻으로 기억합니다. 요한복음이 전해주는 보혜사 성령의 은총에 대한 주님의 말씀 앞에서, 왜 요한복음에서 깊은 위안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분들이 많은지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주님이 언급하신 ‘출교’(ἀποσυνάγωγος, ‘회당에서 쫓아냄’)라는 단어는 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에만 나오며, 유대교의 기독교인 박해와 직접 연관되어 있습니다(요 16:2).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 군대에 의해 파괴된 후 유대교는 성전 중심에서 회당 중심의 랍비 유대교로 재편되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유대교는 평일 기도문에 이단자와 배교자를 저주하는 기도문을 추가했습니다. 이 기도문이 회당 예배에서 낭독될 때,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자신을 저주하는 이 기도에 아멘을 할 수 없었고, 그러면 정체가 드러나 회당에서 쫓겨나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당시 출교는 단순히 회당에 들어가지 못하는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가족 공동체에서도 쫓겨나고, 모든 사회적 관계를 상실하며, 때로는 죽음의 위협까지 받는 일이었습니다. 박해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는 최대치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도움이 있고 없고의 차이에 따라 목숨을 지킬 수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이 성령에 대해 특별히 깊은 이해와 진술을 담고 있는 것은, 요한복음 공동체가 겪어야 했던 박해의 고난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공동체가 보존한 성령에 대한 말씀은 그 공동체가 경험한 보혜사 성령의 흔적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박해 받는 제자들 곁에 머무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성령 사이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텐데, 이는 성령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려 깊은 인도와 보살핌을 동일하게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4)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성령에 대한 이와 같은 말씀은 요한복음 공동체의 특성을 보여주며, 나아가 교회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을 고발하고 죽이려 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그들을 향해 아무런 적개심도 보이지 않는 교회의 모습은 주님으로부터 와서 제자들 곁에 머무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제자들을 출교시키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당치도 않은 이유로 제자들을 죽일 것을 내다보시면서, 그것은 “그들이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6:3). 이는 박해자들을 비난하거나, 그들의 폭력적인 행동을 정죄하는 말씀으로는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한계와 무지를 안타깝게 여기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공동체가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았던 주님의 그 마음을 성령이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박해 받는 교회 안에서 박해자들을 향한 적개심이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교회가 성령의 보살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고발할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이들의 차가운 시선 앞에서 순결한 눈빛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 이런 이들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정말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신비라고밖엔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고난 가운데서도 혹독해지지 않고 더 선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로 존재합니다. 도로테 죌레(Dorothee Sölle)가 말한 것처럼, 그런 이들에게서는 세상을 위로하는 힘이 흘러나옵니다. ‘그것은 성인(聖人)들의 위로다’라는 표현은 사태의 중심을 파악하고 있는 이의 경외심이 담긴 고백이라 할 것입니다(『고난』 229). 연약한 사람들에게서, 위기에 처한 작은 공동체로부터 ‘거룩한 위로’가 흘러나올 수 있다는 말이 과한 말처럼 들리시는지요? 아닙니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습니다. 성령이 그들 곁에 머무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들에게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