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6일 주일예배
부활절 넷째 주일
사 63:7-14; 행 13:26-35; 요 21:1-14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명의 제자들은 디베랴 호수로 고기를 잡으러 갔지만,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거기서 고기를 잡아 본 적이 많은 그들에게도 유난히 일이 되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동이 틀 무렵 맥없이 투망을 반복하던 그들에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 21:5) 원문을 직역하면, “얘들아, [너희] 반찬거리할 것도 없지?”라는 말입니다. 장난기가 느껴지는 질문에 제자들은 짧게 대답했습니다. “없나이다”(οὐ)라는 짧은 대답에는, 그들이 몹시 지쳐 있었고, 고기 잡을 의욕조차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냉랭한 대답을 듣고도, 뭍에서 소리치던 그는 다시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 21:6). 사실 제자들에게는 이 낯선 남자의 지시를 따라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뭍에 있는 사람이 고기가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그의 말대로 배 오른편으로 다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정말로 많은 물고기가 걸려들었습니다.
디베랴 호수에서 있었던 이 이야기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을 경험한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는 은유로 해석돼 왔습니다. 물고기를 잡듯 사람들을 모은다는 선교적인 메시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제자들의 앞날이 투영된 이야기로 읽혀온 것입니다. ‘153’이라는 물고기의 숫자도 그런 식으로 해석됐는데, 히에로니무스라는 고대교회 교부는, 바다에 사는 물고기의 종류가 백쉰세 가지라는 어느 박물학자의 견해를 따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류의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고, 곧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선교를 해야 한다고 이 이야기를 풀이했습니다(에스겔 47:6-12에 대한 해설에서). 이런 해석은 요한복음 다음에 나오는 사도행전의 선교적 내용과 맞물린다는 점에서도 설득력을 얻어왔습니다. 다만, 지난 몇 주간 요한복음을 함께 읽어온 눈으로 볼 때, 이 이야기의 또 다른 핵심이 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거듭된 만남을 통해 조금씩 변화해가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뭍에서 소리치는 남자가 주님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습니다(요 21:7).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그의 말을 듣고, 급히 겉옷을 두르고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는 주님 앞에서 벗은 상태로 있을 수 없었던 베드로가 몸을 가리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베드로의 이해가 전보다 더 깊어졌고,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더 깊이 성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물고기가 가득한 그물을 끌고 뭍으로 올라왔습니다. 그곳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벌써 생선이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배위에서 밤을 지샌 제자들에게는 매우 반가운 장면이었지만, 아무도 그 생선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모두 침묵하며 몸가짐을 삼갔습니다. 자신들 앞에 계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요 21:12). 빈 그물과 고기로 가득 찬 그물의 경험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인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의 본체 앞에서 다른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요 21:14)고 말씀합니다. “세 번째”라는 설명은 단순히 빈도 수를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까닭이 주님과의 반복된 만남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훨씬 더 빨리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고, 적절한 태도로 주님을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해 완강히 부정하거나 당황해 하던 모습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이전 같으면, 주님 앞에서 겉옷을 벗은 채로 일하는 것이 아무 문제도 아니었겠지만,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거듭된 현현을 통해 죽음이 가져온 단절이 다시 이어지는 그 시간, 그 만남의 경험 속에서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아멘
(오호영 목사)
2026년 4월 26일 주일예배
부활절 넷째 주일
사 63:7-14; 행 13:26-35; 요 21:1-14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명의 제자들은 디베랴 호수로 고기를 잡으러 갔지만,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거기서 고기를 잡아 본 적이 많은 그들에게도 유난히 일이 되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동이 틀 무렵 맥없이 투망을 반복하던 그들에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 21:5) 원문을 직역하면, “얘들아, [너희] 반찬거리할 것도 없지?”라는 말입니다. 장난기가 느껴지는 질문에 제자들은 짧게 대답했습니다. “없나이다”(οὐ)라는 짧은 대답에는, 그들이 몹시 지쳐 있었고, 고기 잡을 의욕조차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냉랭한 대답을 듣고도, 뭍에서 소리치던 그는 다시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 21:6). 사실 제자들에게는 이 낯선 남자의 지시를 따라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뭍에 있는 사람이 고기가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그의 말대로 배 오른편으로 다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정말로 많은 물고기가 걸려들었습니다.
디베랴 호수에서 있었던 이 이야기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을 경험한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는 은유로 해석돼 왔습니다. 물고기를 잡듯 사람들을 모은다는 선교적인 메시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제자들의 앞날이 투영된 이야기로 읽혀온 것입니다. ‘153’이라는 물고기의 숫자도 그런 식으로 해석됐는데, 히에로니무스라는 고대교회 교부는, 바다에 사는 물고기의 종류가 백쉰세 가지라는 어느 박물학자의 견해를 따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류의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고, 곧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선교를 해야 한다고 이 이야기를 풀이했습니다(에스겔 47:6-12에 대한 해설에서). 이런 해석은 요한복음 다음에 나오는 사도행전의 선교적 내용과 맞물린다는 점에서도 설득력을 얻어왔습니다. 다만, 지난 몇 주간 요한복음을 함께 읽어온 눈으로 볼 때, 이 이야기의 또 다른 핵심이 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거듭된 만남을 통해 조금씩 변화해가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뭍에서 소리치는 남자가 주님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습니다(요 21:7).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그의 말을 듣고, 급히 겉옷을 두르고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는 주님 앞에서 벗은 상태로 있을 수 없었던 베드로가 몸을 가리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베드로의 이해가 전보다 더 깊어졌고,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더 깊이 성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물고기가 가득한 그물을 끌고 뭍으로 올라왔습니다. 그곳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벌써 생선이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배위에서 밤을 지샌 제자들에게는 매우 반가운 장면이었지만, 아무도 그 생선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모두 침묵하며 몸가짐을 삼갔습니다. 자신들 앞에 계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요 21:12). 빈 그물과 고기로 가득 찬 그물의 경험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인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의 본체 앞에서 다른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요 21:14)고 말씀합니다. “세 번째”라는 설명은 단순히 빈도 수를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까닭이 주님과의 반복된 만남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훨씬 더 빨리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고, 적절한 태도로 주님을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해 완강히 부정하거나 당황해 하던 모습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이전 같으면, 주님 앞에서 겉옷을 벗은 채로 일하는 것이 아무 문제도 아니었겠지만,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거듭된 현현을 통해 죽음이 가져온 단절이 다시 이어지는 그 시간, 그 만남의 경험 속에서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아멘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