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12일 주일예배
부활절 둘째 주일 ‧ 씨뿌림주일
습 3:14-20; 벧전 1:3-12; 눅 24:13-35
주께서 시몬에게 보이셨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돌아오는 길에, 함께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과 다른 제자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서 시신이 사라졌고, 거기서 나타난 천사들이 “예수님이 살아나셨으니, 그가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눅 24:5-6). 그 말씀은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눅 24:7)는 것이었습니다.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가 천사들에게 들은 이 말을 전해주었지만, 이들 두 제자를 비롯한 다른 사도들은 그 말을 허탄하게 여겨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돌아가신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바로 이 지점을 주목합니다. 말씀과 증언을 들었음에도, 죽은 사람은 결코 살아날 수 없다는 ‘경험의 논리’로 되돌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험의 논리는 인간에게 얼마나 확고한 인식의 틀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곤 합니다. 실증주의에 입각해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유비(類比)의 원칙을 내세우는데, 과거의 사건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일어났을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적용하면, 부활은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으므로, 부활은 역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종교적인 경험을 합니다. 그런 경험은 합리적인 범주로 분석될 수 없는 고유한 종류의 것입니다. 천사들을 보았다는 여성 제자들의 경험이 그렇습니다. 그 경험은 다른 이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그 경험은 그 여성 제자들에게 고유한 것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으니 당신들의 경험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몹시 이상한 논리가 됩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내재한 ‘경험의 논리’가 한계를 지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의 종교적 경험에 관한 대화는 처음부터 불가능해집니다.
엠마오의 이야기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에 대한 기사이면서, 두 제자가 인식의 틀을 전환하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굳건한 경험의 논리로 돌아가, 여성 제자들이 보고 들었던 이야기를 이상하게만 여기고 믿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졌다”는 말씀은 경험칙에 매여 있는 그들의 사고를 비유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눅 24:16).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성서의 말씀을 풀어주셨을 때, 그들이 가진 경험의 논리는 깨졌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어떤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과 빵을 떼시는 행위라는 구체적 사건을 통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 논증으로 설득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 안에서 경험의 지평 자체가 열림으로써 가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일 역시 그 두 제자에게 고유한 것으로 남지만, 여기에는 커다란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의 논리에 갇히기 쉽다는 것, 그러나 그 논리를 깨는 길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를 찾아오실 수 있는 주님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전쟁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끝나지 않는 전쟁은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의 꿈이 허황되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도 경험의 논리가 작용합니다. 다시 말해,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고, 평화는 언제나 잠시뿐, 결국에는 다시 전쟁이 오는 게 순리라는 것입니다. 전쟁이 반복된다는 경험칙이 쌓이고 쌓이면서, 항구적인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자신과 타인을 내몰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게 하는 논리가 여기서도 작동됩니다. 죽은 사람은 살아나지 않는다는 경험이 부활의 가능성을 닫아버렸듯이, 전쟁이 반복된다는 경험이 평화의 가능성을 아예 닫아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다는 것은, 경험의 논리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는 자리에서 전혀 다른 가능성을 일으키신 일이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습 3:17). 이 약속은 전쟁의 경험칙이 지배하던 포로시대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죽음 이후의 삶을 믿는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경험의 논리가 불가능성을 말하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전쟁의 시대에도 평화를 포기하지 않게 하는 힘이며, 죽음 앞에서도 영원한 삶을 희망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오호영 목사)
2026년 4월12일 주일예배
부활절 둘째 주일 ‧ 씨뿌림주일
습 3:14-20; 벧전 1:3-12; 눅 24:13-35
주께서 시몬에게 보이셨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돌아오는 길에, 함께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과 다른 제자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서 시신이 사라졌고, 거기서 나타난 천사들이 “예수님이 살아나셨으니, 그가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눅 24:5-6). 그 말씀은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눅 24:7)는 것이었습니다.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가 천사들에게 들은 이 말을 전해주었지만, 이들 두 제자를 비롯한 다른 사도들은 그 말을 허탄하게 여겨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돌아가신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바로 이 지점을 주목합니다. 말씀과 증언을 들었음에도, 죽은 사람은 결코 살아날 수 없다는 ‘경험의 논리’로 되돌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험의 논리는 인간에게 얼마나 확고한 인식의 틀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곤 합니다. 실증주의에 입각해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유비(類比)의 원칙을 내세우는데, 과거의 사건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일어났을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적용하면, 부활은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으므로, 부활은 역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종교적인 경험을 합니다. 그런 경험은 합리적인 범주로 분석될 수 없는 고유한 종류의 것입니다. 천사들을 보았다는 여성 제자들의 경험이 그렇습니다. 그 경험은 다른 이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그 경험은 그 여성 제자들에게 고유한 것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으니 당신들의 경험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몹시 이상한 논리가 됩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내재한 ‘경험의 논리’가 한계를 지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의 종교적 경험에 관한 대화는 처음부터 불가능해집니다.
엠마오의 이야기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에 대한 기사이면서, 두 제자가 인식의 틀을 전환하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굳건한 경험의 논리로 돌아가, 여성 제자들이 보고 들었던 이야기를 이상하게만 여기고 믿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졌다”는 말씀은 경험칙에 매여 있는 그들의 사고를 비유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눅 24:16).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성서의 말씀을 풀어주셨을 때, 그들이 가진 경험의 논리는 깨졌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어떤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과 빵을 떼시는 행위라는 구체적 사건을 통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 논증으로 설득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 안에서 경험의 지평 자체가 열림으로써 가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일 역시 그 두 제자에게 고유한 것으로 남지만, 여기에는 커다란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의 논리에 갇히기 쉽다는 것, 그러나 그 논리를 깨는 길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를 찾아오실 수 있는 주님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전쟁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끝나지 않는 전쟁은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의 꿈이 허황되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도 경험의 논리가 작용합니다. 다시 말해,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고, 평화는 언제나 잠시뿐, 결국에는 다시 전쟁이 오는 게 순리라는 것입니다. 전쟁이 반복된다는 경험칙이 쌓이고 쌓이면서, 항구적인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자신과 타인을 내몰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게 하는 논리가 여기서도 작동됩니다. 죽은 사람은 살아나지 않는다는 경험이 부활의 가능성을 닫아버렸듯이, 전쟁이 반복된다는 경험이 평화의 가능성을 아예 닫아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다는 것은, 경험의 논리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는 자리에서 전혀 다른 가능성을 일으키신 일이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습 3:17). 이 약속은 전쟁의 경험칙이 지배하던 포로시대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죽음 이후의 삶을 믿는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경험의 논리가 불가능성을 말하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전쟁의 시대에도 평화를 포기하지 않게 하는 힘이며, 죽음 앞에서도 영원한 삶을 희망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