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5일 주일예배
부활주일
출 15:13-21; 고전 15:20-28; 요 20:1-10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을 무덤으로 이끈 것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고,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겨갔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말을 듣자마자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감쌌던 수건을 발견했습니다. 수건은 세마포와 다른 자리에, 머리를 쌌던 형태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깨닫지 못한 채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건 전체를 조망하며 본문을 기술하고 있는 요한복음 저자는, “그들이 성경에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요 20:9)라는 설명을 적어놓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빈 무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성서에 비추어 해석하는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편집자적 설명을 통해 독자의 길을 잡아준 적이 많습니다.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는 어휘 설명을 덧붙이기도 하고(요 1:38), 유대인들에게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설해 주기도 했습니다(요 2:21). 이는 요한복음 저자가 단순한 사건의 기록자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시도하는 사람임을 잘 보여줍니다. 그의 해석은 얼핏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실은 교회가 믿고 따르는 정경적 해석이며,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가장 발전된 형태의 그리스도 이해로 평가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빈 무덤과 그 안에 남겨진 세마포와 수건이,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해석을 통해 요한복음이 열어주는 신학적 ‘공간’으로 들어가야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갖는 절대적 의미를 간곡한 말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본문 바로 앞 구절들에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7-19)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치유하기 위한 희생이었으며, 그분의 빈 무덤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다는 부활의 증거라고 말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 118:22-23)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일을 행하셨습니다.
출애굽기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의 출애굽 사건의 의미를 밝혀주는 ‘모세의 노래’입니다. 그는 애굽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뭇 족속이 떨며 돌 같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출 15:14-16). 그때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들은 바다에 빠졌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 생긴 마른 땅을 걸어서 새 땅으로 나아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박해받던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신 일이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에 상응하는 구약의 가장 위대한 구원사적 사건으로 일컬어지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도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는 분명한 틀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된 것을 기록하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존한 데에는, 그 구원사적 의미를 보존하고 계승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출애굽 같은 근본적인 사건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은, 여호와 한분만이 하나님이시며, 그가 백성을 이끄시고 모든 곤경 속에서 건지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러한 사실을 항상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역사적 사건은 오늘의 희망과 신앙의 원천이 됩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맨 마지막에 이런 말을 적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따라감으로써 성서 안에 있는 사람들, 곧 이스라엘 자손과 베드로와 요한, 막달라 마리아가 경험한 사건 앞에 서게 됩니다. 그들이 가졌을 두려움과 놀람, 그리고 기쁨에 대한 공명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그렇게 경험할 때, 우리는 그만큼 성서 안에 있는 세계에 더 다가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길은, 이처럼 그분의 부활에 대한 선포를 듣고, 그 메시지가 열어주는 공간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니며, 영원한 생명과 기쁨으로 충만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호영 목사)
2026년 4월5일 주일예배
부활주일
출 15:13-21; 고전 15:20-28; 요 20:1-10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을 무덤으로 이끈 것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고,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겨갔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말을 듣자마자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감쌌던 수건을 발견했습니다. 수건은 세마포와 다른 자리에, 머리를 쌌던 형태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깨닫지 못한 채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건 전체를 조망하며 본문을 기술하고 있는 요한복음 저자는, “그들이 성경에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요 20:9)라는 설명을 적어놓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빈 무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성서에 비추어 해석하는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편집자적 설명을 통해 독자의 길을 잡아준 적이 많습니다.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는 어휘 설명을 덧붙이기도 하고(요 1:38), 유대인들에게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설해 주기도 했습니다(요 2:21). 이는 요한복음 저자가 단순한 사건의 기록자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시도하는 사람임을 잘 보여줍니다. 그의 해석은 얼핏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실은 교회가 믿고 따르는 정경적 해석이며,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가장 발전된 형태의 그리스도 이해로 평가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빈 무덤과 그 안에 남겨진 세마포와 수건이,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해석을 통해 요한복음이 열어주는 신학적 ‘공간’으로 들어가야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갖는 절대적 의미를 간곡한 말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본문 바로 앞 구절들에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7-19)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치유하기 위한 희생이었으며, 그분의 빈 무덤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다는 부활의 증거라고 말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 118:22-23)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일을 행하셨습니다.
출애굽기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의 출애굽 사건의 의미를 밝혀주는 ‘모세의 노래’입니다. 그는 애굽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뭇 족속이 떨며 돌 같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출 15:14-16). 그때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들은 바다에 빠졌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 생긴 마른 땅을 걸어서 새 땅으로 나아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박해받던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신 일이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에 상응하는 구약의 가장 위대한 구원사적 사건으로 일컬어지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도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는 분명한 틀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된 것을 기록하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존한 데에는, 그 구원사적 의미를 보존하고 계승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출애굽 같은 근본적인 사건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은, 여호와 한분만이 하나님이시며, 그가 백성을 이끄시고 모든 곤경 속에서 건지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러한 사실을 항상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역사적 사건은 오늘의 희망과 신앙의 원천이 됩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맨 마지막에 이런 말을 적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따라감으로써 성서 안에 있는 사람들, 곧 이스라엘 자손과 베드로와 요한, 막달라 마리아가 경험한 사건 앞에 서게 됩니다. 그들이 가졌을 두려움과 놀람, 그리고 기쁨에 대한 공명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그렇게 경험할 때, 우리는 그만큼 성서 안에 있는 세계에 더 다가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길은, 이처럼 그분의 부활에 대한 선포를 듣고, 그 메시지가 열어주는 공간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니며, 영원한 생명과 기쁨으로 충만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