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22일 주일예배
사순절 다섯째 주일
겔 18:1-4, 21-32; 갈 2:15-21; 눅 23:39-43
너희는 돌이키고 살지니라
오늘 에스겔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 포로민들 사이에 떠돌던 속담을 문제 삼으며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땅에 관해,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라는 말입니다(겔 18:2). 잃어버린 땅을 두고 이런 속담이 오갔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땅”이라는 표현을 곱씹어 보면,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당시 포로민들은 바벨론 ‘땅’(에레츠, 영토)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했던 말은 이스라엘 ‘땅’(아다마, 신학적 공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עַל־אַדְמַת יִשְׂרָאֵל(알-아드마트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흙에 관하여’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생명과 언약과 정체성이 깃든 터전, 곧 그들의 삶 자체를 가리킵니다. 포로민들은 하나님께 속했던 자신들의 삶이 통째로 뽑혀나간 것이, 부모 세대의 죄악 때문이라는 탄식을 그 속담에 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 사실에 부합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이 지리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 땅에서 붙잡혀 왔다 해도, 하나님께 받은 생명과 언약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민들의 삶은 숙명론에 바탕을 둔 이 속담으로 인해 무너져 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 남은 징계의 분량을 다 채우는 것뿐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체념하는 것, 그것은 숙명론에 빠진 이들의 공통된 증상입니다. 심리학자 빅토르 프랑클(Viktor Frankl)은 숙명론이 사람들을 절망시키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묘사했습니다. 그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목격한 숙명론의 첫 번째 증상은 감정이 무뎌지는 것이었습니다. 권태, 무력감,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강박이 엄습한 결과입니다. ‘어차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은,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법적이고, 반인륜적인 일 앞에서 인간을 체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프랑클 자신은 숙명론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애썼고, 기적적으로 정신이 무너지는 것을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강제수용소가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갔지만, 자신의 자유는 빼앗지 못했다고 그는 말합니다. “한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어도, 결코 빼앗아갈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인간의 자유, 주어진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을 수 없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주는데, 그분의 십자가 역시 온갖 숙명론과 조롱하는 말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행악자 중 한 사람의 말입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 십자가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 그 누구도 그들을 내려오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역사가 미누키우스 펠릭스의 대화록 『옥타비우스』에는 당시 이교인들이 기독교에 품었던 반감을 둘러싼 논쟁이 담겨 있습니다. 카이킬리우스라는 화자는 기독교인들을 “병약한 망상”에 빠진 이들로 비하합니다. “노파들이 믿을 만한 미신”을 맹신하거나, 모든 참된 종교를 파괴하는 “몰상식하고 열광적인 미신”을 따르는 이들이라고 묘사합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을 예배한다는 사실이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기괴한지를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의 초점이, 자기 행실로 인해 최고형을 당한 한 사람과 파멸에 이르게 하는 나무 십자가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범죄자가 처형된 비참한 안식처가 그들에게 어울린다는 것과 그들이 드리는 예배의 종류를 규정해 준다.”(마르틴 헹엘, 『십자가 처형』, 감은사, 15-16)
그러나 다른 행악자의 마음에는 그와는 다른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구원의 생각이 아니라 심판의 생각이었지만, 그의 생각 안에는 구원의 단초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십자가에서 맞는 죽음을 자신이 행한 일에 마땅한 보응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는 그 행악자가 하나님 없이 십자가에 달려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기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가 죽음의 장소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 행악자의 의식 속에서 그 십자가는 그가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공간, 곧 “아드마트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는 그 행악자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 말씀이,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에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굳게 마음먹은 이들에게, 그리고 가혹한 수난의 현실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간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들려지기를 소원합니다.
(오호영 목사)
2026년 3월 22일 주일예배
사순절 다섯째 주일
겔 18:1-4, 21-32; 갈 2:15-21; 눅 23:39-43
너희는 돌이키고 살지니라
오늘 에스겔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 포로민들 사이에 떠돌던 속담을 문제 삼으며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땅에 관해,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라는 말입니다(겔 18:2). 잃어버린 땅을 두고 이런 속담이 오갔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땅”이라는 표현을 곱씹어 보면,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당시 포로민들은 바벨론 ‘땅’(에레츠, 영토)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했던 말은 이스라엘 ‘땅’(아다마, 신학적 공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עַל־אַדְמַת יִשְׂרָאֵל(알-아드마트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흙에 관하여’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생명과 언약과 정체성이 깃든 터전, 곧 그들의 삶 자체를 가리킵니다. 포로민들은 하나님께 속했던 자신들의 삶이 통째로 뽑혀나간 것이, 부모 세대의 죄악 때문이라는 탄식을 그 속담에 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 사실에 부합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이 지리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 땅에서 붙잡혀 왔다 해도, 하나님께 받은 생명과 언약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민들의 삶은 숙명론에 바탕을 둔 이 속담으로 인해 무너져 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 남은 징계의 분량을 다 채우는 것뿐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체념하는 것, 그것은 숙명론에 빠진 이들의 공통된 증상입니다. 심리학자 빅토르 프랑클(Viktor Frankl)은 숙명론이 사람들을 절망시키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묘사했습니다. 그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목격한 숙명론의 첫 번째 증상은 감정이 무뎌지는 것이었습니다. 권태, 무력감,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강박이 엄습한 결과입니다. ‘어차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은,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법적이고, 반인륜적인 일 앞에서 인간을 체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프랑클 자신은 숙명론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애썼고, 기적적으로 정신이 무너지는 것을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강제수용소가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갔지만, 자신의 자유는 빼앗지 못했다고 그는 말합니다. “한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어도, 결코 빼앗아갈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인간의 자유, 주어진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을 수 없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주는데, 그분의 십자가 역시 온갖 숙명론과 조롱하는 말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행악자 중 한 사람의 말입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 십자가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 그 누구도 그들을 내려오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역사가 미누키우스 펠릭스의 대화록 『옥타비우스』에는 당시 이교인들이 기독교에 품었던 반감을 둘러싼 논쟁이 담겨 있습니다. 카이킬리우스라는 화자는 기독교인들을 “병약한 망상”에 빠진 이들로 비하합니다. “노파들이 믿을 만한 미신”을 맹신하거나, 모든 참된 종교를 파괴하는 “몰상식하고 열광적인 미신”을 따르는 이들이라고 묘사합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을 예배한다는 사실이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기괴한지를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의 초점이, 자기 행실로 인해 최고형을 당한 한 사람과 파멸에 이르게 하는 나무 십자가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범죄자가 처형된 비참한 안식처가 그들에게 어울린다는 것과 그들이 드리는 예배의 종류를 규정해 준다.”(마르틴 헹엘, 『십자가 처형』, 감은사, 15-16)
그러나 다른 행악자의 마음에는 그와는 다른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구원의 생각이 아니라 심판의 생각이었지만, 그의 생각 안에는 구원의 단초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십자가에서 맞는 죽음을 자신이 행한 일에 마땅한 보응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는 그 행악자가 하나님 없이 십자가에 달려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기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가 죽음의 장소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 행악자의 의식 속에서 그 십자가는 그가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공간, 곧 “아드마트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는 그 행악자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 말씀이,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에서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굳게 마음먹은 이들에게, 그리고 가혹한 수난의 현실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간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들려지기를 소원합니다.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