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 2026. 3. 15. / 사 59:1-3, 9-20; 딤전 1:12-17; 요 19:1-16

관리자
2026-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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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15일 주일예배

사순절 넷째 주일, 총회순교자기념주일

사 59:1-3, 9-20; 딤전 1:12-17; 요 19:1-16

우리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오늘 이사야서 59장에서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백성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신다는 원망에 답합니다. 이는 이사야서 58장부터 이어지는 금식 논쟁의 연장선으로, 예언자는 백성들의 불평을 조목조목 반박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이 멀리 계셔서, 너희에게 손이 닿지 않아 구원하지 못하시는 게 아니며, 하나님의 귀가 어두우셔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직 너희의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의 죄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게 한 것일 뿐”이라고 선포합니다(사 59:1-2).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레위기 16장 규정에 따라 대속죄일에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금식은 “스스로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으며, 육신의 안락을 포기하는 종교적 고행입니다. 따라서 속죄일의 금식을 공로사상으로 곡해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금식을 하면, 반드시 보답이 있다는 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은 그처럼 왜곡된 금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금식기간을 잘 견뎠는데 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느냐는 말이겠습니다.

 

겨우 금식을 마친 뒤 자신들이 처한 고난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던 백성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몸을 씻고 예복을 갈아입고 나왔어도, 그들의 손에 묻은 피는 지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사 59:3).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 옷에 남은 핏자국을 말끔히 씻어내고, 표정을 바꾸어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아무것도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구원 받기를 바라고 기도가 상달될 것이라고 믿었다는 게 황당할 따름입니다. 그것은 금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위선의 가면을 벗기를 호소합니다. 사람을 죽게 하고도 아무런 사죄도 하지 않고, 여지껏 위선의 탈을 써온 그들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낱낱이 고발합니다.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 우리가 맹인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사 59:9-10)

 

지난 2022년 5월 한 이탈리아 일간지에 실린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터뷰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교황은 러시아 정교회의 키릴 총대주교와 나눈 화상통화 내용을 공개하며, 키릴 주교가 20분 동안이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정당성을 자신에게 설명했다고 말했습니다. 키릴 주교는 침공 직후 국가근위대 대장에게 성화를 선물하여, 침략 전쟁을 축복한다는 비난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는 또한 성인의 유물을 순회 전시하며, 러시아 군대의 승리를 위한 기도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는 기도문을 배포했는데, 낭독을 거부한 알렉세이 우민스키 신부를 파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키릴 총대주교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했습니다. “형제여, 우리는 국가의 사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정치의 언어가 아니라 예수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 [러시아 정교회의] 총대주교는 푸틴의 제단의 시종(altar boy)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키릴 주교의 행보는 ‘손에 피를 묻힌 채 금식을 하는 위선’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며칠 전 트럼프 대통령을 위한다며, “이란 침공이 옳은 일”이라고 말했다는 개신교 목사들의 행위도 그와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 속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잔치를 먹기 위해’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던 대제사장 집단입니다(요 18:28).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하게 했지만, 그렇게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 자신은 그런 망상을 지속할지 모르지만, 아무도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무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키릴 총대주교도, 트럼프의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역시 이들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의 죄악과 위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면서, 우리의 상식과는 결이 다른 뜻밖의 내용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살펴보셨다”고 언급하며(사 59:15), 그들을 구원하고, 동시에 보복하러 오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해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할 이가 없자, 하나님이 스스로 행동하시기로 하셨다는 말씀입니다(사 59:15-19). 여기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실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타인의 피를 흘린 이들이 합당한 보응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정의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복잡하게 만드는 지점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당신의 투구로 삼으신다”는 말씀입니다(사 59:17). 단순히 보복만을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보복자이면서 동시에 구속자로서” 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키릴 총대주교에 강조한 예수의 언어, 즉 하나님의 언어가 아닐까 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분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언어, 우리가 귀기울여 듣고, 세상 앞에 증언해야 할 말씀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씀한 하나님의 구원과 보복이 언제, 어디서 이루어졌느냐고 묻는다면,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살인자들과 위선자들에게 이러저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가리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누군가에게 일어난 이러저러한 일을 하나님의 행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행위라고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 하나님의 보복과 분노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말해야 할 언어, 곧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분은 다음과 같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셨고, 또 보복하셨습니다. 빌라도에게 끌려가 채찍질을 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셨으며, 조롱과 모욕을 받으셨습니다. 율법으로도, 로마법으로도 정죄될 것이 없으셨음에도, 대제사장 집단에 의해 빌라도에게 넘겨지셨고, 로마의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로 끌려가셨습니다(요 19:1-16). 손에 피를 묻히고도 하나님의 구원을 기도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이 바로 그분에게서 이루어졌고, 자신의 죄과를 떠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또한 그분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이상 할 말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살기로 가득한 언어가 온 세상에 난무하는 것이 보이십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 양의 말씀, 그 십자가의 말씀을 더 깊이 듣고, 그에 공명하는 우리이기를 기도합니다. 


(오호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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