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 2026. 3. 8. / 사 60:9-14; 빌 3:17-4:1; 요 18:28-40

관리자
202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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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8일 주일예배 

사순절 셋째 주일 

사 60:9-14; 빌 3:17-4:1; 요 18:28-40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은 안나스와 가야바를 거쳐 빌라도의 관정으로 끌려가셨습니다. 대제사장의 하수인들은 예수님의 죄가 무엇인지 밝히지도 않은 채 사형만 집행해 주면 된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8:30) 이는 대제사장의 세력이 로마 총독부에 영향력을 미칠 정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추측됩니다. 빌라도가 제대로 된 재판을 하라고 요구하자,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요 18:31)라며 교묘하게 압박했고, 결국 빌라도가 물러서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수난은 유다의 배신으로 시작되었고, 빌라도의 재판에서 절정에 다가갑니다. 하지만 그들은 독자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대제사장의 돈에 매수되었고, 빌라도 역시 대제사장 집단의 압력에 떠밀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의 실질적 동인은 대제사장 집단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은 대제사장 집단으로 하여금 위기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과 성전 귀족들의 수입이 대부분 성전에서 나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는 예수님의 질책은 성전에서 행해지는 일들이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기에 충분했습니다. 그곳은 순례자와 기도자와 상인들로 늘 북적거렸지만, 그곳에서 나오는 이익은 대부분 대제사장 집단에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사익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멀리서 예물을 가져온 순례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저잣거리의 소음과 흥정소리로 가득한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의식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과 같이 분노의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 집단의 더러운 욕망과 폭력성은 인간의 양심(良心)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라고 고백하며 은전을 돌려주는 유다를 차갑게 내쫓았을 때 그들의 추악한 계략은 이미 폭로된 것이었습니다. 유다를 미혹한 사탄은 그 집단의 거짓과 탐욕이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 역사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 18:38)라는 빌라도의 무죄 선언에도 아랑곳없이, 예수님 대신 강도를 풀어달라고 요구하는 그들의 실체는 반사회적 세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집단이 지배 세력이 되어 있으니 민중의 시름이 깊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도다”(마 21:13)라는 예수님의 매서운 비판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며 힘을 실어드린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라는 빌라도의 신문 역시, 수많은 민중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그 배경으로 한다 하겠습니다. 


빌라도의 신문은 안나스의 신문과 달랐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라는 질문은, 뜻밖에도, 예수님 가르침의 중심 주제를 건드렸습니다. 잘 살펴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대제사장 집단과 같은 평면 위에 놓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요 18:35)며, 예수님의 나라를 이 세상 나라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가 전제하는 그 나라와 당신의 나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그리고 당신께서는 분명히 왕이시며, 그 나라를 위하여 태어나셨고, 그 나라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8:36). 결국 이 대답을 통해, 대제사장 세력이 공격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당신의 나라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1세기 헬레니즘 문명 가운데서 쓰였습니다.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이 그 배경에 흐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상의 나라와 구분하신 뜻을 온전히 헤아리려면, 이 철학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고대 헬라 철학자들은 인간이 경험하는 실재에 두 개의 층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는 본질적인 층위(essential level)이고, 다른 하나는 실존적인 층위(existential level)입니다. 본질적인 층위는 사물의 참된 모습, 있어야 할 모습이고, 실존적인 층위는 우리가 현실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모습입니다. 이 두 층위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 간극이 바로 모든 존재가 겪는 갈등과 긴장의 근원입니다. 인간의 실존은 본질의 그림자이거나 불완전한 모방일 뿐입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현실적 욕망은 끝없이 팽창하면서 본질적인 것을 위협하고 짓누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나라를 위협하는 이 세상 나라, 곧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몰아가는 대제사장 세력에게서 본질적인 것을 위협하는 부정적인 힘을 감지합니다. 


지금 전세계가 목격하고 있는 전쟁은 끝없이 팽창하는 인간의 현실적 욕망이 본질적인 것을 위협하고 짓누르는 현상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실적인 힘의 강압에 떠밀리는 존재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새로운 존재(New Being)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본질적 존재를 회복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Paul Tillich). 대제사장 세력과 빌라도가 예수님의 나라를 비존재로 환원시킬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의 마지막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속해 있고, 그분의 나라를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은 이 세상 나라에 저항하는 모든 용기의 원천입니다. ‘존재에의 용기’가 우리에게, 또한 전쟁으로 고통 받고 희생 당한 모든 이들의 것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 3:21-4:1) 


(오호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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