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그의 제자가 아니냐 / 2026. 3. 1. / 삼하 12:1-3; 행 3:11-21; 요 18:12-27

관리자
2026-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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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1일 주일예배 

사순절 둘째 주일/ 3.1절기념주일 

삼하 12:1-3; 행 3:11-21; 요 18:12-27 

너도 그의 제자가 아니냐 


대제사장의 하수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대제사장의 저택으로 압송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기다린 건 안나스였습니다. 그는 최고의회에서 예수님을 신문하기에 앞서 1차 신문을 진행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 신문이 법적 절차를 어겼으며, 거기서 안나스의 시종이 예수님을 구타했다는 사실을 기술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사람의 범법 여부를 가릴 때에는 두세 사람의 증인을 세워야 했습니다(신 19:15-17). 고발한 사람의 말만 들어서는 안 되며, 여러 사람의 증언을 들어보고 신중하게 판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안나스는 증인도 없이 신문을 진행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는 언제나 공개적으로 가르쳤고 은밀하게 말한 일이 없으니, 당신이 한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요 18:20). 증인을 세워달라는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안나스에게는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의 시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을 때렸고, “대제사장에게 말을 똑바로 하라”며 윽박질렀습니다(요 18:22). 


그날 대제사장의 저택에는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도 있었습니다. 그 제자는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대제사장과의 친분을 이용해 저택에 들어갔고, 베드로가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해 줄 수 있었습니다(요 18:16). 베드로가 그 집에 들어가자마자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아본 사람들이 그를 추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요 18:17, 25, 27). 예수님의 제자라는 신분을 숨긴 건 다른 제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대제사장과의 친분을 이용할 뿐 내내 침묵을 지킵니다. 그런데, 이들 두 사람의 제자가 그곳에 있었다고 말하는 데서 요한복음의 메시지가 드러납니다(막 14:69-72, 마 26:69-75 비교). “두 사람”이면 그 재판에서 예수님을 위한 증인이 되어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참된 증언을 해줄 수 있다면, 최고의회도 함부로 판단을 내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증인도 없이 가야바에게 끌려가시는 예수님의 모습 뒤로 베드로와 다른 제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해가 되면서도,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린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지 않았다면 하지 않아도 될 생각이겠지만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이야기 속에 자기 자신을 포함시킴으로써 이야기의 층위를 확장시켰습니다. 그날 대제사장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은 시몬 베드로 한 사람의 부끄러움으로 남을 일이 아니라는 자기 고백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는 왜 이런 고백을 했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그 옆에서 자신도 침묵하고 있었다는 것을 굳이 드러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른 복음서를 그대로 옮겼다면 아무도 몰랐을 텐데, 왜 스스로 죄인의 자리를 선택했을까요? 사도 요한은 양심의 목소리를 저버릴 수 없었던 듯합니다. 마치 자신은 예수님의 수난과 아무 관련도 없다는 듯이, 예수님을 부인한 건 베드로 한 사람뿐이었다고 복음서를 기술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알렉산더 슈메만(Alexander Schmemann)은 “서로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당부에 대해 사유하다 양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는 양심이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말해주는 내면의 소리나, 선과 악을 식별해 내는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양심은 그보다 더 깊고 신비로운 무언가”입니다(『우리 아버지』, 비아, 61-64).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 카라마조프는 실제로는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동시에 그와 관련해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확신합니다. 그에게서 양심이 지닌 신비로운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양심이란 바로 이러한 깊은 확신, 분명 죄(sin)를 지었다는 확신, 죄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자각, 어떤 범죄나 악한 행위가 아닌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악, 우리 심연에서 일어난 타락으로 인해 저 모든 범죄(crime)가 일어났다는, 그러나 어떤 법도 그 타락을 벌하는 데는 무력하다는 확신이다. […] 양심은 우리 삶에 자리한 내적 분열, 내적 갈등, 삶과의 불화, 불신, 사랑도 하나 됨도 없는 세계와 같은 현실을 폭로한다.”


“양심은 법을 만족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함을, 사랑을 회복시키려 하기 때문이다.”(슈메만) 시간상으로 아주 오랜 전에 있었던 일, 자신이 그곳에 있지 않았다는 알리바이가 확실함에도, 그곳에 자신이 있었고, 그 일에 자신도 연루되어 있다고 느끼게 하는 그것이 양심의 신비입니다. 양심의 외침을 수용한 인간은 죄인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는 자신의 온전성을 되찾고, 자신 안에 있는 신비인 사랑을 회복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양심의 고백을 통해 복음서 기자라는 객관적 자리에서 복음의 실제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한편, 다윗의 이야기는 양심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다윗도 양심의 가책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단의 책망 앞에서야 자신의 범죄를 자백합니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지만, 벌을 피하지는 못합니다.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삼하 12:10) 만약 다윗이 양심의 목소리를 따랐다면 어땠을까요?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양심에 호소하는 설교를 했을 때 유대인들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행 3:13-15). 만약 그들이 양심의 움직임을 따랐다면 어땠을까요? 양심의 길은 가까우면서도 아득히 먼 길이지만, 온전함과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오호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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