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 2026. 2. 22. / 애 3:55-66; 롬 7:14-25; 요 13:16-30

관리자
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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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22일 주일예배 

사순절 첫째 주일 

애 3:55-66; 롬 7:14-25; 요 13:16-30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를 저주 받은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가 대제사장의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겼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유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이라는 말을 듣습니다(마 26:24). 누가복음에서도 그는 예수님께 입을 맞춤으로써 예수님이 체포되게 하려 한 배신자로 그려져 있습니다(눅 22:48). 배신의 동기에 대해서는, “사탄이 그에게 들어가” 모든 일을 꾸미게 했다고 설명합니다(눅 22:3).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과 비교할 때 요한복음은 한층 더 부정적으로 유다의 특성을 묘사합니다. 그를 “열두 제자 중에 속한 마귀”라고 규정하는 말씀에서입니다(요 6:70-71). 사탄이 불어넣는 생각대로 움직이는 사탄의 도구인 것을 넘어, 유다를 마귀 자신이라고 표현한 것은 다른 복음서의 묘사보다 훨씬 더 부정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유다는 철저히 드러나지 않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는데, 자신을 감추고 있는 것은 마귀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주신 떡을 받고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요 13:30). 


유다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배신이라는 그의 행위에 따른 당연한 평가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유다의 이야기 속에 배신이라는 주제만 있는 건 아닙니다. 스승을 배신한 잘못 외에 우리 자신을 성찰하게 만드는 신앙적 주제도 내포돼 있으며, 그것은 로마서의 사도 바울의 말씀을 염두에 둘 때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바울은 인간이 죄 아래 팔려가는 일에 대해 말씀합니다. 선을 행하길 원하는데도 악을 행하게 되는 인간, 죄의 힘에 포획되어 무력하게 끌려가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4-15) 이는 모든 사람이 처한 삶의 한 단면에 관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이야기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를 향해 “배신자다!” “사탄의 노예다!” “아니, 그 자신이 바로 사탄이다!” 하고 비난해도 무방하지만, 따지고 보면,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욕망과 악의 시험에 취약한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세 이탈리아의 예술가 조반니 카나베시오(Giovanni Canavesio)는 「유다의 자살」이라는 프레스코화를 남겼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것을 뒤늦게 뉘우친 유다가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매단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유다는 의식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악마가 자기의 몸에 저지르는 짓을 보고 경악합니다. 악마가 그의 배를 열어 어떤 존재를 꺼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가의 설명을 찾을 수 없어 악마가 꺼내는 그 존재가 누구이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서에 근거를 두고 그 존재가 “부정한 영혼”이나 유다의 몸속에 들어갔던 “사탄”일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그 존재의 연약한 모습은 “부정한 영혼” 같지 않으며, 더욱 “사탄”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존재는 유다와 흡사하며,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순수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만약 화가가 사탄을 그리려고 했다면, 그 존재를 잡아당기고 있는 악마처럼 시커먼 짐승의 형상으로 그렸더라면 더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화가는 유다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을 보여주려 했던 게 아닐는지요? 


마태복음에 따르면, 유다가 스스로 목을 맨 경위는 이렇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관정에 끌려와 심문받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다가, 예수님이 정죄당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이 준 은전 삼십 개를 도로 갖다주면서 자신의 잘못을 실토합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지만 사태를 돌이킬 수는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마 27:4)며 유다를 내쫓았습니다. 이에 유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맨 것입니다. 카나베시오가 보여주려 한 것은 악마의 집요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악마는 유다가 회개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들의 마음을 차갑게 타락시켜 유다의 뉘우침을 무용지물로 만들었고, 스스로 목을 매 죗값을 받으려한 유다의 마지막 양심마저 뿌리 뽑으려 달려들고 있습니다. 악마를 바라보는 유다의 표정에는 경악과 절망이 뒤섞여 있습니다. 악마가 자신의 뱃속을 헤집으며 자기 자신을, 자신의 마지막 양심을 빼앗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카나베시오는 잔인한 묘사로 유명한데, 거기에는 교훈적 의도가 있습니다. 비참하고 절망적인 인간의 상황을 강렬하게 묘사하여, 그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시선을 돌리게 만들려 한 것입니다. 죄 아래 팔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성찰한 끝에 그리스도를 향해 눈을 돌리는 사도 바울처럼 말입니다(롬 7:24-25). 하지만 유다는 잘못을 돌이킬 기회를 빼앗겼습니다. 악마는 끝까지 그를 물어뜯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다의 마지막 모습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적신 빵을 주셨습니다.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를 가리키시는 행위였지만(요 13:26), 유다에 대한 긍휼을 나타낸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유다가 그것을 잘 삼키도록 “적신 빵”을 주신 데서 죄에 팔려가는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묻어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셔서”(descendit ad inferos, “장사되어”)라는 사도신조의 고백에는 어떤 죄인도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유다가 속량을 받으리라는 희망을 말하는 것은 낯설지만, 우리의 신앙은 분명히 그러한 희망을 포함합니다. 아멘 


(오호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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