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11일 주일예배
주현절 첫째 주일
겔 3:16-21; 행 4:1-4, 13-21; 마 4:12-25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니라
세례 요한이 체포되면서, 예수님도 몸을 피하셔야 했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이후 예수님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없어 확실치 않지만,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함께 사역을 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두 분의 선포가 동일했다는 마태복음의 기록은 그런 추측이 사실일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3:2). 세례 요한의 체포가 예수님에게도 위험한 일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처럼 두 분의 메시지가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래 피신해 계시진 않았습니다. 갈릴리에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가버나움으로 옮기신 이후에는 독자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을 본거지로 삼았던 것과 달리, 예수님은 마을로 사람들을 찾아가셨고, 제자들을 선택해 당신과 함께 일하도록 하셨습니다(마 4:19). 일사천리로 사역을 해나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예수님 사역의 대상은,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마 4:15). 예언자의 말로 하면, 그들은 “흑암에 앉은 백성이요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마 4:16)이라 불릴 정도로 비참하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실제적으로는, “백성 가운데 병들고 약한 모든 사람들, 곧 모든 앓는 자,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마 4:23-24)입니다. 예수님 사역의 대상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식별해 보는 것은 예수님과의 동일성을 갖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교회의 지속가능성이 낮아지고 있는 이 때에,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나가는 것만큼 좋은 길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서울노회에서는 교회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방안의 하나로 교회 합병에 관한 의견을 설문하고 있습니다. 규모가 작은 교회간 합병을 통해 교회의 물적 토대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벌써부터 교회 합병을 시행해온 교단도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의 역사를 돌아볼 때, 교회의 지속가능성을 떨어뜨리는 일, 곧 교회의 존립을 불확실하게 만든 원인은 늘 그 정체성의 훼손으로부터 야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지 않고, 이기심과 탐심에 휩쓸려 변질될 때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께서 그 공동체를 위기에 직면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속가능성에 관한 논의는 우선 예수님과의 동일성을 묻는 정체성 질문으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사역이 오늘 우리의 교회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반성함으로써 교회는 자기 정체성을 올바로 세워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존립의 위기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 더욱 실패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로 묘사된 사람들은 단지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개인일뿐만 아니라, 당시의 지배적인 가치관에 따라 실패자라고 규정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는 그런 사람들을 부정한 자들이라고 정죄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책임감을 느껴야 할 일은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지만, 그들처럼 소외되고, 차별의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의 회복과 치유를 위한 사역은 교회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할 근본적 과업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지배적인 가치관이 있고, 그로 인해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초래됩니다. 부와 건강, 사회적 지위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강력한 가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가난과 질병, 사회적인 실패는 부정되고, 사회적 차별의 이유로 작동하게 됩니다. 보건의료학자들은 사회적 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아프다는 사실을 통계적 수치로 제시합니다(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 2017).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 할 때, 사회지도층의 불의한 가치관과 행태를 비판하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는 건 그 때문입니다. 그들의 불의는 오롯이 사회적 약자들의 피해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체포되고, 예수님도 같은 위험을 겪으셔야 했던 데에는, 그분들의 사역에 강력한 사회적 메시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 이스라엘 선지자들과 초기 교회의 사도들도 그런 긴장을 피하지 않았습니다(겔 33:16-21; 행 4:14-21 참조).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의 지속가능성은 교회의 사역이 예수님의 사역과 연속성을 갖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의 물적 토대를 지키는 것도 필요하지만, 고통 받는 사람들을 찾아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려 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자신의 지속가능성을 자본과 물질에 기대어 확보하려는 경향이 세상을 지배하고, 이제는 교회 안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기도 했던 교회의 신앙 전통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이질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선진들을 본받읍시다. 자신의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겼을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간 어부들처럼, 우리의 삶과 모든 희망을 주님께 의탁하고 나아갑시다. 아멘
(오호영 목사)
2026년 1월 11일 주일예배
주현절 첫째 주일
겔 3:16-21; 행 4:1-4, 13-21; 마 4:12-25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니라
세례 요한이 체포되면서, 예수님도 몸을 피하셔야 했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이후 예수님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없어 확실치 않지만,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함께 사역을 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두 분의 선포가 동일했다는 마태복음의 기록은 그런 추측이 사실일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3:2). 세례 요한의 체포가 예수님에게도 위험한 일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처럼 두 분의 메시지가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래 피신해 계시진 않았습니다. 갈릴리에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가버나움으로 옮기신 이후에는 독자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을 본거지로 삼았던 것과 달리, 예수님은 마을로 사람들을 찾아가셨고, 제자들을 선택해 당신과 함께 일하도록 하셨습니다(마 4:19). 일사천리로 사역을 해나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예수님 사역의 대상은,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마 4:15). 예언자의 말로 하면, 그들은 “흑암에 앉은 백성이요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마 4:16)이라 불릴 정도로 비참하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실제적으로는, “백성 가운데 병들고 약한 모든 사람들, 곧 모든 앓는 자,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마 4:23-24)입니다. 예수님 사역의 대상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식별해 보는 것은 예수님과의 동일성을 갖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교회의 지속가능성이 낮아지고 있는 이 때에,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나가는 것만큼 좋은 길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서울노회에서는 교회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방안의 하나로 교회 합병에 관한 의견을 설문하고 있습니다. 규모가 작은 교회간 합병을 통해 교회의 물적 토대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벌써부터 교회 합병을 시행해온 교단도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의 역사를 돌아볼 때, 교회의 지속가능성을 떨어뜨리는 일, 곧 교회의 존립을 불확실하게 만든 원인은 늘 그 정체성의 훼손으로부터 야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지 않고, 이기심과 탐심에 휩쓸려 변질될 때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께서 그 공동체를 위기에 직면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속가능성에 관한 논의는 우선 예수님과의 동일성을 묻는 정체성 질문으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사역이 오늘 우리의 교회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반성함으로써 교회는 자기 정체성을 올바로 세워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존립의 위기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 더욱 실패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로 묘사된 사람들은 단지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개인일뿐만 아니라, 당시의 지배적인 가치관에 따라 실패자라고 규정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는 그런 사람들을 부정한 자들이라고 정죄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책임감을 느껴야 할 일은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지만, 그들처럼 소외되고, 차별의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의 회복과 치유를 위한 사역은 교회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할 근본적 과업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지배적인 가치관이 있고, 그로 인해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초래됩니다. 부와 건강, 사회적 지위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강력한 가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가난과 질병, 사회적인 실패는 부정되고, 사회적 차별의 이유로 작동하게 됩니다. 보건의료학자들은 사회적 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아프다는 사실을 통계적 수치로 제시합니다(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 2017).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 할 때, 사회지도층의 불의한 가치관과 행태를 비판하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는 건 그 때문입니다. 그들의 불의는 오롯이 사회적 약자들의 피해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체포되고, 예수님도 같은 위험을 겪으셔야 했던 데에는, 그분들의 사역에 강력한 사회적 메시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 이스라엘 선지자들과 초기 교회의 사도들도 그런 긴장을 피하지 않았습니다(겔 33:16-21; 행 4:14-21 참조).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의 지속가능성은 교회의 사역이 예수님의 사역과 연속성을 갖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의 물적 토대를 지키는 것도 필요하지만, 고통 받는 사람들을 찾아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려 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자신의 지속가능성을 자본과 물질에 기대어 확보하려는 경향이 세상을 지배하고, 이제는 교회 안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기도 했던 교회의 신앙 전통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이질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선진들을 본받읍시다. 자신의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겼을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간 어부들처럼, 우리의 삶과 모든 희망을 주님께 의탁하고 나아갑시다. 아멘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