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3일 주일예배
창조절 일곱째 주일
창 9:1-7, 벧전 4:1-11, 마 25:14-30
선한 청지기 같이
하나님께서 노아를 방주 밖으로 부르시며 하신 말씀은 첫 인간을 세상에 내실 때 하셨던 말씀과 거의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9:1) 그런데 창세기 1장과 9장 본문은 공통점만큼이나 차이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양식의 종류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첫 인간에게는 모든 채소와 나무의 열매를 양식으로 주셨으나(1:29) 홍수 심판 이후의 인간에게는 짐승과 새와 물고기의 고기를 먹도록 허락해 주십니다(9:3). 이는 첫 인간의 환경과 노아와 그 자식들이 살아갈 환경이 다른 데서 기인하는 듯합니다. 첫 인간은 채소와 열매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지만, 홍수로 파괴된 땅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노아에게는 방주에 태웠던 짐승을 잡아먹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양식의 종류가 달라진 데에는 노아와 그 자식들의 시급한 생존문제가 놓여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고기를 먹되 그 생명 되는 피째로는 먹지 말라고 제한을 두셨습니다(9:4). 이는 첫 인간에게 동산의 모든 열매를 먹도록 허락해 주시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은 먹지 못하게 하신 것과 유사해 보입니다(2:16-17). 우리는 이러한 문학적 유사성을 통해 고기를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라는 말씀의 무게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다른 생물을 죽일 수 있지만 거기에는 인간이 취해서는 안 될 금단의 영역이 존재합니다(9:5-6). 만약 인간이 무분별하게 생명을 취한다면 그에 대해 매우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9:4-5) 그러나 인간은 그 역사의 시초에 받은 이 천명(天命)을 수시로 배반해 왔습니다. 노아의 아들들에게서 나온 민족들 사이에 싸움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인간은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역사를 써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자신의 폭력과 살인에 대해 끝없이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폭력적인 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현실주의가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피 흘린 사람에게 그 책임을 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온갖 핑계를 대며 어겨온 하나님의 이 명령을 중심에 가져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폭력을 포기한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전세계가 폭력의 신화로 덮여가는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달란트, 곧 우리가 가진 화해의 능력을 깨달아야 합니다(25:14-15).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위를 위해 폭력을 선택하고, 같은 명분으로 인종청소라는 극악의 폭력까지 자행하는 이 시대는 우리가 그 달란트의 가치를 드러내야 할 소명의 자리입니다.
오늘 베드로전서 본문에서 사도는 아마도 가정에서 모임을 갖는 지하교회였을 작은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고난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벧전 4:1). 이방인들은 자신들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그들을 비방하지만, 사도는 그럼에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그리스도의 길을 뒤따르자고 권고합니다(4:5). 뜨거운 사랑에 허다한 죄가 덮인다는 그들의 소망은 이 거친 세상에서 과연 무용할 뿐일는지요? 우리가 받은 것은 ‘주님의 달란트’입니다. 그것은 이 폭력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다른 달란트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호영 목사)
2024년 10월 13일 주일예배
창조절 일곱째 주일
창 9:1-7, 벧전 4:1-11, 마 25:14-30
선한 청지기 같이
하나님께서 노아를 방주 밖으로 부르시며 하신 말씀은 첫 인간을 세상에 내실 때 하셨던 말씀과 거의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9:1) 그런데 창세기 1장과 9장 본문은 공통점만큼이나 차이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양식의 종류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첫 인간에게는 모든 채소와 나무의 열매를 양식으로 주셨으나(1:29) 홍수 심판 이후의 인간에게는 짐승과 새와 물고기의 고기를 먹도록 허락해 주십니다(9:3). 이는 첫 인간의 환경과 노아와 그 자식들이 살아갈 환경이 다른 데서 기인하는 듯합니다. 첫 인간은 채소와 열매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지만, 홍수로 파괴된 땅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노아에게는 방주에 태웠던 짐승을 잡아먹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양식의 종류가 달라진 데에는 노아와 그 자식들의 시급한 생존문제가 놓여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고기를 먹되 그 생명 되는 피째로는 먹지 말라고 제한을 두셨습니다(9:4). 이는 첫 인간에게 동산의 모든 열매를 먹도록 허락해 주시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은 먹지 못하게 하신 것과 유사해 보입니다(2:16-17). 우리는 이러한 문학적 유사성을 통해 고기를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라는 말씀의 무게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다른 생물을 죽일 수 있지만 거기에는 인간이 취해서는 안 될 금단의 영역이 존재합니다(9:5-6). 만약 인간이 무분별하게 생명을 취한다면 그에 대해 매우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9:4-5) 그러나 인간은 그 역사의 시초에 받은 이 천명(天命)을 수시로 배반해 왔습니다. 노아의 아들들에게서 나온 민족들 사이에 싸움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인간은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역사를 써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자신의 폭력과 살인에 대해 끝없이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폭력적인 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현실주의가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피 흘린 사람에게 그 책임을 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온갖 핑계를 대며 어겨온 하나님의 이 명령을 중심에 가져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폭력을 포기한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전세계가 폭력의 신화로 덮여가는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달란트, 곧 우리가 가진 화해의 능력을 깨달아야 합니다(25:14-15).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위를 위해 폭력을 선택하고, 같은 명분으로 인종청소라는 극악의 폭력까지 자행하는 이 시대는 우리가 그 달란트의 가치를 드러내야 할 소명의 자리입니다.
오늘 베드로전서 본문에서 사도는 아마도 가정에서 모임을 갖는 지하교회였을 작은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고난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벧전 4:1). 이방인들은 자신들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그들을 비방하지만, 사도는 그럼에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그리스도의 길을 뒤따르자고 권고합니다(4:5). 뜨거운 사랑에 허다한 죄가 덮인다는 그들의 소망은 이 거친 세상에서 과연 무용할 뿐일는지요? 우리가 받은 것은 ‘주님의 달란트’입니다. 그것은 이 폭력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다른 달란트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