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9일 주일예배
창조절 다섯째 주일
출 16:1-8, 13-15; 고전 11:23-26; 요 6:26-35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오늘 교회력 성서본문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교회 공동체의 특별한 식사와 관련된 이야기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게 된 일과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생명의 떡으로서 자신을 나타내신 일, 그리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공동식사에서 발생한 문제를 수습하면서 성만찬으로서 공동식사의 의미를 가르친 말씀입니다. 이 세 가지 말씀들은 모두 갈등요소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그 식사가 무엇인지 완전히 알지 못하였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출 16:15). 하늘에서 내린 양식을 보고 “이것이 무엇이냐?” 하고 질문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물음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또한 성만찬 자리에서 거듭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만찬, 곧 공동식사에서 발생한 문제를 다룹니다. 그 식사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하여 시행케 한 것으로,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거룩한 만찬입니다(고전 11:23-25).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하루에 한 번, 일과가 끝난 저녁 시간에 한자리에 모여 배불리 먹는 공동식사(δειπνον)로 성만찬을 먹었습니다. 그 식사는 친한 사람들끼리 나누는 만찬이나 가족들이 함께 먹는 식사와는 구별됩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신앙으로 모인 형제자매들이 한 아버지의 식탁에서 밥을 먹는 성가족공동체를 실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김판임, 『바울과 고린도교회』, 189). 그리스도인들은 정성스럽게 식사를 준비하면서, 서로 식탁 시중을 들어주고, 대화하면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사귐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공동식사를 올바르게 행하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음식을 먼저 가져다 먹거나, 일찍부터 술에 취한 사람들이 생김으로써 거룩한 공동식사의 의미가 훼손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11:21). 왜 그들은 모든 사람이 모이기 전에 먼저 식사를 한 것일까요? 고린도교회는 일과 후나 혹은 해가 넘어갈 무렵을 모임 시간으로 정했을 것입니다. 시간을 계측할 수 있는 수단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사람마다 도착하는 시간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문제의 본질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일을 정시에 마칠 수 없는 노예 신분 그리스도인이나 일용직 노동자들은 더 늦게 귀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먼저 온 사람들이 이들을 기다려주지 않은 것입니다. 늦게 오는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남겨 놓고 아무리 깍듯이 맞아준다고 해도 식사를 먼저 함으로써 생겨난 차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엄중하게 비판합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11:22)
바울은 공동식사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11:23-25 참조). 예수의 말씀은 공동식사가 우리 모두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 내용으로 한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11:27)입니다. 늦게 오는 형제자매들을 기다려주지 않는 것은 숨겨진 차별의식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먹는 게 합당하게 먹는 것일까요? 공동식사를 위하여 모일 때 “서로 기다리는 것”(11:33)입니다. 모두 함께 모여,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가 믿음 안에서 한 가족이며, 모두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로 그보다 더 나은 일은 없습니다. 늦었지만 오고 있는 형제자매들, 오늘은 오지 못하는 형제자매들,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형제자매들을 생각하며 기다리는 것은 서로의 형제자매 됨을 더없이 깊게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오호영 목사)
2024년 9월 29일 주일예배
창조절 다섯째 주일
출 16:1-8, 13-15; 고전 11:23-26; 요 6:26-35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오늘 교회력 성서본문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교회 공동체의 특별한 식사와 관련된 이야기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게 된 일과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생명의 떡으로서 자신을 나타내신 일, 그리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공동식사에서 발생한 문제를 수습하면서 성만찬으로서 공동식사의 의미를 가르친 말씀입니다. 이 세 가지 말씀들은 모두 갈등요소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그 식사가 무엇인지 완전히 알지 못하였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출 16:15). 하늘에서 내린 양식을 보고 “이것이 무엇이냐?” 하고 질문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물음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또한 성만찬 자리에서 거듭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만찬, 곧 공동식사에서 발생한 문제를 다룹니다. 그 식사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하여 시행케 한 것으로,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거룩한 만찬입니다(고전 11:23-25).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하루에 한 번, 일과가 끝난 저녁 시간에 한자리에 모여 배불리 먹는 공동식사(δειπνον)로 성만찬을 먹었습니다. 그 식사는 친한 사람들끼리 나누는 만찬이나 가족들이 함께 먹는 식사와는 구별됩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신앙으로 모인 형제자매들이 한 아버지의 식탁에서 밥을 먹는 성가족공동체를 실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김판임, 『바울과 고린도교회』, 189). 그리스도인들은 정성스럽게 식사를 준비하면서, 서로 식탁 시중을 들어주고, 대화하면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사귐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공동식사를 올바르게 행하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음식을 먼저 가져다 먹거나, 일찍부터 술에 취한 사람들이 생김으로써 거룩한 공동식사의 의미가 훼손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11:21). 왜 그들은 모든 사람이 모이기 전에 먼저 식사를 한 것일까요? 고린도교회는 일과 후나 혹은 해가 넘어갈 무렵을 모임 시간으로 정했을 것입니다. 시간을 계측할 수 있는 수단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사람마다 도착하는 시간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문제의 본질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일을 정시에 마칠 수 없는 노예 신분 그리스도인이나 일용직 노동자들은 더 늦게 귀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먼저 온 사람들이 이들을 기다려주지 않은 것입니다. 늦게 오는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남겨 놓고 아무리 깍듯이 맞아준다고 해도 식사를 먼저 함으로써 생겨난 차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엄중하게 비판합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11:22)
바울은 공동식사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11:23-25 참조). 예수의 말씀은 공동식사가 우리 모두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 내용으로 한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11:27)입니다. 늦게 오는 형제자매들을 기다려주지 않는 것은 숨겨진 차별의식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먹는 게 합당하게 먹는 것일까요? 공동식사를 위하여 모일 때 “서로 기다리는 것”(11:33)입니다. 모두 함께 모여,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가 믿음 안에서 한 가족이며, 모두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로 그보다 더 나은 일은 없습니다. 늦었지만 오고 있는 형제자매들, 오늘은 오지 못하는 형제자매들,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형제자매들을 생각하며 기다리는 것은 서로의 형제자매 됨을 더없이 깊게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