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2일 주일예배
창조절 넷째 주일
대하 1:7-12; 살전 5:12-28: 마 7:1-12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역대기가 편찬된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는 페르시아 제국의 패권 시대가 마감되고 헬레니즘 문명이 부상하는 격변기였습니다. 이스라엘 예언자 집단은 페르시아 제국의 몰락을 하나님의 역사 개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역대기를 쓴 서기관들의 관심은 이스라엘의 내부 문제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신학적인 주장이 점차 강해지면서, 그들이 이스라엘의 제의에서 떨어져나가는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신학적인 대응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라이너 알베르츠, 『이스라엘 종교사 Ⅱ』, 358). 사마리아인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후손으로, 다윗과 솔로몬이 이어가는 유다 공동체와는 정치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다른 정체성을 길러 왔습니다. 사회적으로 매우 비참한 상황에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신학적인 사유를 시도했고, 마침내 자신들이 가난하고 비참한 상황에서 오히려 진정한 경건을 갖게 되었다는 인식이 확고해지자 유다 공동체의 제의에서 이탈하게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유다 전통을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서들을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초기 역사의 정경인 오경(五經)만을 인정했고, 그것에 열성을 다해 의존하면서 엄청난 자양분을 얻었습니다(라이너 알베르츠, 356). 이와 같은 일련의 분열 과정은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유다 공동체의 적법성을 문제 삼게 만들었습니다. 유다 공동체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전에 대답해야 했고, 역대기의 서술은 바로 그 작업의 결과입니다. 다윗을 선택하신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통치까지 돌봐주신다는 인식은 남유다 전통을 강화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기초였습니다. 다윗 왕권의 계승과 아울러 이스라엘의 제의의 연속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역대하 본문의 배경에는 이와 같은 역사적 과제가 놓여 있었습니다.
꿈에 하나님 앞에 선 솔로몬은 자기 아버지 다윗에게 베푸신 은혜를 자신에게도 베풀어달라고 거듭 간구합니다(대하 1:8-9). 자신을 왕이 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자신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시작하신 일을 지속하는 것일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내 아버지 다윗에게 허락하신 것을 이제 굳게 하옵소서.”(1:9) 역대기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간구를 긍정하시고, 그가 구한 지혜와 지식에 더하여 부와 재물과 영광까지 주시겠다고 하신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사마리아 사람들의 자기 인식과도 유사한 것인데, 하나님 백성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며, 사람은 다만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써 그 역사에 봉사할 따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기도’라는 오늘 교회력 본문들의 공통 주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구한 것은 백성을 위해 그 자신이 생각해낸 선(善)이 아닙니다. 그는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생각하면서 그에 필요한 것, 그렇지만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것을 구했습니다(1:10). 솔로몬에게는 과(過)도 많지만, 적어도 이 순간 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왕의 직무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솔로몬은 지금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자기를 맞추는 조율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만약 누가, 어떻게 기도하는 사람이 솔로몬처럼 하나님의 인정과 응답을 받을 수 있는지 묻는다면, 자신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것을 구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이와 연결되는 메시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라는 황금률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이 기도에 관한 가르침의 맥락에 놓여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7:7-8), 또한 떡을 구하는 아들에게 돌을 주거나, 생선을 구하는데 뱀을 줄 아버지가 없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단지 사람이 구하고 찾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보다 더 좋은 것,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은사까지 주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의 논리구조로 볼 때 아버지께서 주시는 더 좋은 것이 황금률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7:12). “구하라”고 하셨을 때 황금률을 구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대개 다른 구할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경청하면서, 어떻게 해야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이룰 수 있는지를 절실히 묻고 찾는 사람이라면, 계명의 작은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또 그것들을 행하며 가르칠 수 있는 방도를 찾는 사람이라면(5:17-20),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황금률을 가르쳐주신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의 정신이며 산상설교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이웃사랑 계명을 실천하는 가장 단순한 길이 황금률대로 행동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주실(이루어주실) 것입니다(살전 5:24). 오늘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어두운 세계 정세와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갈등, 기후변화로 인한 문제 등 너무나 크고 복잡한 과제는 우리를 암담하게 만듭니다. 해결의 실마리가 좀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다가오고 있으며, 또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생명과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그 나라를 지향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좋은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실히 일해나가면 어느새 어둠과 혼란이 전부 사라진 새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구하고 찾고 두드립시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9-10)
(오호영 목사)
2024년 9월 22일 주일예배
창조절 넷째 주일
대하 1:7-12; 살전 5:12-28: 마 7:1-12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역대기가 편찬된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는 페르시아 제국의 패권 시대가 마감되고 헬레니즘 문명이 부상하는 격변기였습니다. 이스라엘 예언자 집단은 페르시아 제국의 몰락을 하나님의 역사 개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역대기를 쓴 서기관들의 관심은 이스라엘의 내부 문제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신학적인 주장이 점차 강해지면서, 그들이 이스라엘의 제의에서 떨어져나가는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해 신학적인 대응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라이너 알베르츠, 『이스라엘 종교사 Ⅱ』, 358). 사마리아인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후손으로, 다윗과 솔로몬이 이어가는 유다 공동체와는 정치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다른 정체성을 길러 왔습니다. 사회적으로 매우 비참한 상황에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신학적인 사유를 시도했고, 마침내 자신들이 가난하고 비참한 상황에서 오히려 진정한 경건을 갖게 되었다는 인식이 확고해지자 유다 공동체의 제의에서 이탈하게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유다 전통을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서들을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초기 역사의 정경인 오경(五經)만을 인정했고, 그것에 열성을 다해 의존하면서 엄청난 자양분을 얻었습니다(라이너 알베르츠, 356). 이와 같은 일련의 분열 과정은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유다 공동체의 적법성을 문제 삼게 만들었습니다. 유다 공동체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전에 대답해야 했고, 역대기의 서술은 바로 그 작업의 결과입니다. 다윗을 선택하신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통치까지 돌봐주신다는 인식은 남유다 전통을 강화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기초였습니다. 다윗 왕권의 계승과 아울러 이스라엘의 제의의 연속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역대하 본문의 배경에는 이와 같은 역사적 과제가 놓여 있었습니다.
꿈에 하나님 앞에 선 솔로몬은 자기 아버지 다윗에게 베푸신 은혜를 자신에게도 베풀어달라고 거듭 간구합니다(대하 1:8-9). 자신을 왕이 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자신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시작하신 일을 지속하는 것일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내 아버지 다윗에게 허락하신 것을 이제 굳게 하옵소서.”(1:9) 역대기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간구를 긍정하시고, 그가 구한 지혜와 지식에 더하여 부와 재물과 영광까지 주시겠다고 하신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사마리아 사람들의 자기 인식과도 유사한 것인데, 하나님 백성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며, 사람은 다만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써 그 역사에 봉사할 따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기도’라는 오늘 교회력 본문들의 공통 주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구한 것은 백성을 위해 그 자신이 생각해낸 선(善)이 아닙니다. 그는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생각하면서 그에 필요한 것, 그렇지만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것을 구했습니다(1:10). 솔로몬에게는 과(過)도 많지만, 적어도 이 순간 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왕의 직무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솔로몬은 지금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자기를 맞추는 조율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만약 누가, 어떻게 기도하는 사람이 솔로몬처럼 하나님의 인정과 응답을 받을 수 있는지 묻는다면, 자신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것을 구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이와 연결되는 메시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라는 황금률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이 기도에 관한 가르침의 맥락에 놓여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7:7-8), 또한 떡을 구하는 아들에게 돌을 주거나, 생선을 구하는데 뱀을 줄 아버지가 없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단지 사람이 구하고 찾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보다 더 좋은 것,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은사까지 주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의 논리구조로 볼 때 아버지께서 주시는 더 좋은 것이 황금률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7:12). “구하라”고 하셨을 때 황금률을 구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대개 다른 구할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경청하면서, 어떻게 해야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이룰 수 있는지를 절실히 묻고 찾는 사람이라면, 계명의 작은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또 그것들을 행하며 가르칠 수 있는 방도를 찾는 사람이라면(5:17-20),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황금률을 가르쳐주신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의 정신이며 산상설교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이웃사랑 계명을 실천하는 가장 단순한 길이 황금률대로 행동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주실(이루어주실) 것입니다(살전 5:24). 오늘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어두운 세계 정세와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갈등, 기후변화로 인한 문제 등 너무나 크고 복잡한 과제는 우리를 암담하게 만듭니다. 해결의 실마리가 좀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다가오고 있으며, 또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생명과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그 나라를 지향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좋은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실히 일해나가면 어느새 어둠과 혼란이 전부 사라진 새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구하고 찾고 두드립시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9-10)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