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8일
창조절 여섯째 주일예배
출 33:18-23; 롬 11:33-36; 눅 10:21-24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이스라엘은 영토를 갖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떠도는 나그네였습니다. 그러한 형편은 그들 역사에서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강대국의 폭력과 착취는 소수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약자의 서러움과 가난의 고통을 각인시켰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어두운 나날 가운데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 32:10, 12)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로 그 역사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32:7).
역사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이스라엘 신앙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는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고 성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관조하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을 기억함으로써 오늘의 삶을 밝혀줄 빛과 의미를 찾아내려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역사의 의미를 중시하는 태도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이 어느 장애인의 다리를 고치는 기적을 일으키자, 그 일을 자기들이 알고 있는 신화를 따라 해석합니다.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몰라본 사람들이 징벌을 받았다는 시인 오비드의 말을 교훈으로 삼고서, 기적을 행한 바울과 바나바를 신적 존재로 숭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성급하고 미개한 행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들과 성정이 동일한 사람을 신으로 숭배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들이 가진 신화가 그들의 신을 제대로 경배하게 하지 못하고, 그 신봉자들의 행위에 신중함을 더해주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허물투성이인 인간을 신으로 숭배케 하고, 인간 스스로 다른 인간 아래의 존재로 격하시키게 만드는 그런 신화는 인간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러한 신화의 허구성을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가르쳐줍니다.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행 14:15)며 복음을 증언한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의 신화는 역사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그 신화는 아무런 실질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합니다. 복음이 2,000년이라는 역사의 무게를 견뎠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가 인간적인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떠받쳐왔다는 사실과 크게 대조되는 일입니다. 성서의 역사는 화석이 아닙니다. 성서 자체가 성서에 담긴 역사를 강조하는 까닭은 성서 안에 살아 있는 정신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광야에서의 급식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광야에 모인 수천 명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보호를 바라며 예수님 곁에 모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감각과 갈망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찾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향하여 뜨거운 마음을 표현하시는데(막 8:2-3),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황무지와 광야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에게서 느껴온 긍휼과 같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8:4) 하고 예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없는 빈곤한 현실을 보았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떡과 물고기를 모아서 나누기를 시작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도, 이스라엘의 역사적 신앙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비(慈悲)에 대한 기억이 사람들을 움직이면, 사막과 같은 광야도 삶의 터전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대한 기억이 모든 신앙인을 평화와 위로가 가득한 삶으로 이끄시기를 소원합니다.
(오호영 목사)
2023년 10월 8일
창조절 여섯째 주일예배
출 33:18-23; 롬 11:33-36; 눅 10:21-24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이스라엘은 영토를 갖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떠도는 나그네였습니다. 그러한 형편은 그들 역사에서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강대국의 폭력과 착취는 소수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약자의 서러움과 가난의 고통을 각인시켰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어두운 나날 가운데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 32:10, 12)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로 그 역사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32:7).
역사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이스라엘 신앙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는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고 성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관조하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을 기억함으로써 오늘의 삶을 밝혀줄 빛과 의미를 찾아내려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역사의 의미를 중시하는 태도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이 어느 장애인의 다리를 고치는 기적을 일으키자, 그 일을 자기들이 알고 있는 신화를 따라 해석합니다.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몰라본 사람들이 징벌을 받았다는 시인 오비드의 말을 교훈으로 삼고서, 기적을 행한 바울과 바나바를 신적 존재로 숭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성급하고 미개한 행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들과 성정이 동일한 사람을 신으로 숭배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들이 가진 신화가 그들의 신을 제대로 경배하게 하지 못하고, 그 신봉자들의 행위에 신중함을 더해주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허물투성이인 인간을 신으로 숭배케 하고, 인간 스스로 다른 인간 아래의 존재로 격하시키게 만드는 그런 신화는 인간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러한 신화의 허구성을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가르쳐줍니다.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행 14:15)며 복음을 증언한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의 신화는 역사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그 신화는 아무런 실질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합니다. 복음이 2,000년이라는 역사의 무게를 견뎠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가 인간적인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떠받쳐왔다는 사실과 크게 대조되는 일입니다. 성서의 역사는 화석이 아닙니다. 성서 자체가 성서에 담긴 역사를 강조하는 까닭은 성서 안에 살아 있는 정신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광야에서의 급식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광야에 모인 수천 명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보호를 바라며 예수님 곁에 모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감각과 갈망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찾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향하여 뜨거운 마음을 표현하시는데(막 8:2-3),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황무지와 광야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에게서 느껴온 긍휼과 같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8:4) 하고 예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없는 빈곤한 현실을 보았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떡과 물고기를 모아서 나누기를 시작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도, 이스라엘의 역사적 신앙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비(慈悲)에 대한 기억이 사람들을 움직이면, 사막과 같은 광야도 삶의 터전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대한 기억이 모든 신앙인을 평화와 위로가 가득한 삶으로 이끄시기를 소원합니다.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