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30일 주일예배
대림절 첫째 주일
단 3:13-28; 계 18:21-24; 마 10:16-33
내가 주를 기다리나이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파송 강화(講話)의 일부입니다. 강화의 서두로 돌아가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신 다음, 그들이 가야 할 곳과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일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온갖 병과 허약함을 고쳐주도록 하셨습니다(마 10:5-8).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규칙 하나를 덧붙여 주셨는데요. 그 전도여행을 위해서, 금화든 은화든 동전이든 여비를 갖고 가지 말고, 여벌의 옷, 신발, 지팡이 따위를 소지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어디서든 적합한 사람을 찾아 몸을 의탁하도록 하셨습니다(9-11절). 그러면서,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10절)고 하셨고, 제자들을 도와주는 사람에 대한 보상도 약속하셨습니다(42절).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 여정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란, 로마제국에 수탈 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중을 가리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목자도 없이 이리 떼에 쫓겨다니는 양처럼 지배자들에게 농락 당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다니엘서 본문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바벨론 유배 시에 다니엘과 친구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우상숭배를 강요 당하는 장면을 보셨습니다만(단 3:13-15),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지배세력의 억압과 횡포에 시달림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숙고해 볼 때, 제자들이 가서 마주해야 할 대상은 이스라엘의 평범한 민중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위에 군림하고 있던 지배자들도 상대해야 할지 몰랐고, 바로 거기에 예수님의 염려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6절 이하의 말씀은 이런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마 10:16-18)
제자들은 사나운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야만 합니다. 회당과 법정에 끌려가서 모함을 당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합니다. 지배자들의 행위는 생각보다 더 악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굴복시켜야 하는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권력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의 고발에 맞서 혐의를 벗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에 가깝습니다. 주머니의 동전 한닢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 10:25)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아무것도 소지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동전 한닢, 옷 한벌도 올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배자들의 억누름 아래 선지자들과 성도들은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계 18:24). 하지만 위험하다고, 두렵다고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예수님은 이토록 철저히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세상 지배자들의 잔인함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어째서 그들은 목자적 직분에 있으면서도 이리 떼처럼 포악하게 구는 걸까요? 어느 봉쇄수도원의 수도자가 ‘타다 만 연탄’을 가지고 성찰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과거 가정에서 연탄을 쓰던 시절, 새 연탄에 제대로 불이 붙지 않아 치명적인 일산화탄소 중독을 일으키는 일이 많았습니다. 잠자던 일가족이 참변을 당하기도 하고, 평생 장애를 얻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타다 만 연탄’은 남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만 끼치는 사람을 닮았습니다. 자신이 굉장한 지위에 있다고만 생각하고, 자신이 그 지위에 적합한 존재인지 겸손히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타인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치게 됩니다. 무고한 유대인들의 신앙을 조롱하는 느부갓네살 왕이나, 식민 지배를 겪는 동포들을 돌봐주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괴롭히는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모습이 꼭 그렇습니다. 이제 대림절입니다. 활활 타올라 온 집안을 온기로 채우고, 마침내 하얗게 변한 연탄재.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모습이 그처럼 순결하고 아름답기를 소망합니다.

황재형 作 - 연탄
(오호영 목사)
2025년 11월 30일 주일예배
대림절 첫째 주일
단 3:13-28; 계 18:21-24; 마 10:16-33
내가 주를 기다리나이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파송 강화(講話)의 일부입니다. 강화의 서두로 돌아가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신 다음, 그들이 가야 할 곳과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일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온갖 병과 허약함을 고쳐주도록 하셨습니다(마 10:5-8).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규칙 하나를 덧붙여 주셨는데요. 그 전도여행을 위해서, 금화든 은화든 동전이든 여비를 갖고 가지 말고, 여벌의 옷, 신발, 지팡이 따위를 소지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어디서든 적합한 사람을 찾아 몸을 의탁하도록 하셨습니다(9-11절). 그러면서,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10절)고 하셨고, 제자들을 도와주는 사람에 대한 보상도 약속하셨습니다(42절).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 여정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란, 로마제국에 수탈 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중을 가리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목자도 없이 이리 떼에 쫓겨다니는 양처럼 지배자들에게 농락 당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다니엘서 본문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바벨론 유배 시에 다니엘과 친구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우상숭배를 강요 당하는 장면을 보셨습니다만(단 3:13-15),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지배세력의 억압과 횡포에 시달림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숙고해 볼 때, 제자들이 가서 마주해야 할 대상은 이스라엘의 평범한 민중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위에 군림하고 있던 지배자들도 상대해야 할지 몰랐고, 바로 거기에 예수님의 염려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6절 이하의 말씀은 이런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마 10:16-18)
제자들은 사나운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야만 합니다. 회당과 법정에 끌려가서 모함을 당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합니다. 지배자들의 행위는 생각보다 더 악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굴복시켜야 하는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권력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의 고발에 맞서 혐의를 벗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에 가깝습니다. 주머니의 동전 한닢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 10:25)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아무것도 소지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동전 한닢, 옷 한벌도 올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배자들의 억누름 아래 선지자들과 성도들은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계 18:24). 하지만 위험하다고, 두렵다고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예수님은 이토록 철저히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세상 지배자들의 잔인함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어째서 그들은 목자적 직분에 있으면서도 이리 떼처럼 포악하게 구는 걸까요? 어느 봉쇄수도원의 수도자가 ‘타다 만 연탄’을 가지고 성찰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과거 가정에서 연탄을 쓰던 시절, 새 연탄에 제대로 불이 붙지 않아 치명적인 일산화탄소 중독을 일으키는 일이 많았습니다. 잠자던 일가족이 참변을 당하기도 하고, 평생 장애를 얻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타다 만 연탄’은 남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만 끼치는 사람을 닮았습니다. 자신이 굉장한 지위에 있다고만 생각하고, 자신이 그 지위에 적합한 존재인지 겸손히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타인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치게 됩니다. 무고한 유대인들의 신앙을 조롱하는 느부갓네살 왕이나, 식민 지배를 겪는 동포들을 돌봐주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괴롭히는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모습이 꼭 그렇습니다. 이제 대림절입니다. 활활 타올라 온 집안을 온기로 채우고, 마침내 하얗게 변한 연탄재.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모습이 그처럼 순결하고 아름답기를 소망합니다.
황재형 作 - 연탄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