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27일 주일예배
성령강림 후 일곱째 주일
미 4:1-4; 계 19:1-10; 마 25:31-46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하지만, 세상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뜻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에 닥쳐올 재앙과 파괴에 관한 말씀을 전했던 미가는 그 둘째 단락(4장)에서도 시온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심판은 재앙과 파괴가 아니라 평화를 가져다주는 심판입니다.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미 4:3) 심판의 결과가 평화라는 말씀은 우리가 눈여겨보지 못했던 하나님 심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의 백성들이 찬양하는 분도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롭다’며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계 19:1-2). 하나님은 음행으로 땅을 더럽혀온 큰 음녀를 심판하시고, 어린 양과 혼인하기 위해 자신을 준비한 신부가 단장하게 해 주셨습니다(19:7-8). 그 혼인은 세상의 질서가 온전히 회복될 것을 보여주는 구원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사건이 된 데에는, 그곳에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준비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모든 무기를 내려놓고 싸움과 전쟁을 포기한 사람들과 약속한 혼인일에 맞추어 자신을 준비한 신부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재앙이 임하는 날이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의 목적에 다가가는 날이며, 해원의 은총을 경험하는 날입니다. 물론 그 날을 만드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표현된 ‘하나님의 통치행위’에서 비롯됩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인정을 통해 신부는 신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큰 음녀라는 상징적 존재로 표현된 죄는 인간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실재입니다. 그 권세를 무력화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예수님 말씀의 중심에 있습니다. 곧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의 삶 가운데에 들어오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심판하시려고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는데, 이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앉으신 것입니다(마 25:31). 하나님을 대신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소외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심으로써 그들에 대한 행위에 따라 전혀 다른 심판을 받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굶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나그네들, 헐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그리고 옥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생각지 못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 존재였는지를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로 하여금 영벌의 길을 피하고, 영생의 길을 선택하도록 이끌어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이보다 잘 표현된 말씀도 없을 것 같습니다.
4세기 기독교의 호스텔병원은 교회와 수도원, 병원과 빈민보호시설이 결합된 복합 콤플렉스로 가난한 자들, 헐벗고 지친 여행자들과 순례자들에게 육체적 치료와 영혼의 돌봄을 제공하였습니다. 이처럼 가난하고 병약한 이들을 돌보는 수도생활의 원천이 된 것은 예수님의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고대의 소박한 호스텔병원이 유럽의 개신교인들이 일궈온 근대적 호스텔병원의 모델이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힘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합니다. 그곳의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가장 좋은 준비를 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이 점점 더 커져가서 우리도 그와 같은 섬김과 베풂의 공동체를 일구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호영 목사)
2025년 7월 27일 주일예배
성령강림 후 일곱째 주일
미 4:1-4; 계 19:1-10; 마 25:31-46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하지만, 세상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뜻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에 닥쳐올 재앙과 파괴에 관한 말씀을 전했던 미가는 그 둘째 단락(4장)에서도 시온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심판은 재앙과 파괴가 아니라 평화를 가져다주는 심판입니다.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미 4:3) 심판의 결과가 평화라는 말씀은 우리가 눈여겨보지 못했던 하나님 심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의 백성들이 찬양하는 분도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롭다’며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계 19:1-2). 하나님은 음행으로 땅을 더럽혀온 큰 음녀를 심판하시고, 어린 양과 혼인하기 위해 자신을 준비한 신부가 단장하게 해 주셨습니다(19:7-8). 그 혼인은 세상의 질서가 온전히 회복될 것을 보여주는 구원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사건이 된 데에는, 그곳에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준비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모든 무기를 내려놓고 싸움과 전쟁을 포기한 사람들과 약속한 혼인일에 맞추어 자신을 준비한 신부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재앙이 임하는 날이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의 목적에 다가가는 날이며, 해원의 은총을 경험하는 날입니다. 물론 그 날을 만드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표현된 ‘하나님의 통치행위’에서 비롯됩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인정을 통해 신부는 신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큰 음녀라는 상징적 존재로 표현된 죄는 인간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실재입니다. 그 권세를 무력화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예수님 말씀의 중심에 있습니다. 곧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의 삶 가운데에 들어오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심판하시려고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는데, 이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앉으신 것입니다(마 25:31). 하나님을 대신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소외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심으로써 그들에 대한 행위에 따라 전혀 다른 심판을 받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굶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나그네들, 헐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그리고 옥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생각지 못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 존재였는지를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로 하여금 영벌의 길을 피하고, 영생의 길을 선택하도록 이끌어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이보다 잘 표현된 말씀도 없을 것 같습니다.
4세기 기독교의 호스텔병원은 교회와 수도원, 병원과 빈민보호시설이 결합된 복합 콤플렉스로 가난한 자들, 헐벗고 지친 여행자들과 순례자들에게 육체적 치료와 영혼의 돌봄을 제공하였습니다. 이처럼 가난하고 병약한 이들을 돌보는 수도생활의 원천이 된 것은 예수님의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고대의 소박한 호스텔병원이 유럽의 개신교인들이 일궈온 근대적 호스텔병원의 모델이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힘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합니다. 그곳의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가장 좋은 준비를 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이 점점 더 커져가서 우리도 그와 같은 섬김과 베풂의 공동체를 일구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