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13일 주일예배
성령강림 후 다섯째 주일
슥 4:1-14; 고전 12:1-11; 눅 17:5-10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스가랴가 예루살렘 주민에게 전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하셨다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는 순금 등잔대 위에 놓인 일곱 개의 등잔과 그 양옆에 있는 두 그루의 감람나무를 보았습니다. 일곱 등잔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며, 두 감람나무는 ‘기름 부음 받은 두 사람’을 상징합니다(슥 4:10-14). 세상 모든 민족을 한데 모으시려는 하나님 곁에 두 사람의 종이 서 있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 그 둘 가운데 한 사람은 예루살렘 총독 스룹바벨일 것입니다. 그 환상의 의미를 헤아리고 있던 스가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4:6)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4:9) 이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며, 그와 관련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성전 재건이 주민들에게 부담이 되는 여러 가지 요구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스가랴는 성전을 재건하도록 주민들을 이끌었습니다. 일찍이 보았던 환상을 통해, 재건될 예루살렘 성전이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요, 보살핌과 안전에 대한 징표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슥 1:16-17). 그때 스가랴는, 하나님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 성읍을 위해 신원하는 천사를 보았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선하고, 위로하는 하나님의 그 말씀’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이었고, 예루살렘을 버리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신다는 놀라운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성전 재건에 담긴 또 한 가지 중요한 의의는,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이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성전 재건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역했던 그들 조상의 길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다고 스스로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1:4).
예루살렘 주민 중에는 성전 재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스룹바벨에게 성전을 재건할 힘이 없다고 비난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현실론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슥 1:10). 그러나 스가랴가 본 환상과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그들의 현실론을 뒤흔드는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환상을 보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가져오는 충격 앞에서 피상적인 인식과 판단은 힘을 잃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신령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고전 12:1)고 말씀했는데, 스가랴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전하는 환상과 하나님의 말씀이 그와 같은 ‘신령한 것’입니다. 보통 합리적이고 물질주의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을 현실주의자라고 칭하지만, 참된 현실주의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의 현실론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뜻하신 일이 무엇이냐는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을 때는 우상에게 끌려다녔고, 현세적인 가치만을 추구했습니다. 우상이 주는 심리적인 효과에 취해 우상을 신령한 것으로 오인함으로써 악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고대 교회의 교부들은 그러한 우상 숭배를 가리켜 ‘신기루의 희생물이 되는 일’, 곧 ‘무서운 자기 기만’(πλάνη)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신령한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과 성령의 은사를 통해 교회를 세우는 봉사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고전 12:3 이하).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더해달라고 간청하는 사도들에게, 단순한 순종에 굳건히 머무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해야 할 일을 했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족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눅 17:10).
(오호영 목사)
2025년 7월 13일 주일예배
성령강림 후 다섯째 주일
슥 4:1-14; 고전 12:1-11; 눅 17:5-10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스가랴가 예루살렘 주민에게 전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하셨다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는 순금 등잔대 위에 놓인 일곱 개의 등잔과 그 양옆에 있는 두 그루의 감람나무를 보았습니다. 일곱 등잔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며, 두 감람나무는 ‘기름 부음 받은 두 사람’을 상징합니다(슥 4:10-14). 세상 모든 민족을 한데 모으시려는 하나님 곁에 두 사람의 종이 서 있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 그 둘 가운데 한 사람은 예루살렘 총독 스룹바벨일 것입니다. 그 환상의 의미를 헤아리고 있던 스가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4:6)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4:9) 이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며, 그와 관련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성전 재건이 주민들에게 부담이 되는 여러 가지 요구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스가랴는 성전을 재건하도록 주민들을 이끌었습니다. 일찍이 보았던 환상을 통해, 재건될 예루살렘 성전이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요, 보살핌과 안전에 대한 징표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슥 1:16-17). 그때 스가랴는, 하나님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 성읍을 위해 신원하는 천사를 보았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선하고, 위로하는 하나님의 그 말씀’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이었고, 예루살렘을 버리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신다는 놀라운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성전 재건에 담긴 또 한 가지 중요한 의의는,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이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성전 재건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역했던 그들 조상의 길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다고 스스로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1:4).
예루살렘 주민 중에는 성전 재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스룹바벨에게 성전을 재건할 힘이 없다고 비난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현실론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슥 1:10). 그러나 스가랴가 본 환상과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그들의 현실론을 뒤흔드는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환상을 보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가져오는 충격 앞에서 피상적인 인식과 판단은 힘을 잃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신령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고전 12:1)고 말씀했는데, 스가랴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전하는 환상과 하나님의 말씀이 그와 같은 ‘신령한 것’입니다. 보통 합리적이고 물질주의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을 현실주의자라고 칭하지만, 참된 현실주의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의 현실론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뜻하신 일이 무엇이냐는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을 때는 우상에게 끌려다녔고, 현세적인 가치만을 추구했습니다. 우상이 주는 심리적인 효과에 취해 우상을 신령한 것으로 오인함으로써 악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고대 교회의 교부들은 그러한 우상 숭배를 가리켜 ‘신기루의 희생물이 되는 일’, 곧 ‘무서운 자기 기만’(πλάνη)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신령한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과 성령의 은사를 통해 교회를 세우는 봉사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고전 12:3 이하).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더해달라고 간청하는 사도들에게, 단순한 순종에 굳건히 머무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해야 할 일을 했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족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눅 17:10).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