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5일 주일예배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
신 30:15-20; 갈 5:16-26; 막 4:1-20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이란의 핵 시설에 대한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이 촉발시킨 상호 보복 공격으로 중동 지역 분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안보 논리를 내세워 이란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협상과 같은 평화로운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인종청소 수준의 살육을 자행해온 터여서, 또 다시 군사적 해결책을 선택한 이스라엘을 용납하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물론 전쟁은 매우 복합적인 원인을 갖는 사안이어서, 섣부른 판단은 피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일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괴리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습니다. 평화에 대한 성서의 말씀은 덮어놓고 전쟁을 정당화하는 구절을 뽑아내는 그들의 입장을 지지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육체의 소욕과 탐심에 미혹 받는 존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는 이유에 대해 우리 나름의 성찰을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번 전쟁의 배경에는, 성령의 이끄심이 아니라 육체의 소욕을 따른 이스라엘의 신앙적 실패가 놓여 있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쟁의 원인을 신앙의 실패에서 찾는다는 말이 설득력이 떨어질는지 몰라도, 신앙의 문제가 우리의 삶에 질적인 차이를 야기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전쟁을 하기로 한 것은 최선(最善)의 선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차악(次惡)을, 아니 최악(最惡)을 선택한 것일 뿐입니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 30:19) 이스라엘은 살기 위하여 전쟁을 선택했다고, 곧 자신들이 선택한 것이 궁극적으로는 생명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남을 죽이고 내가 사는 일이 생명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소욕과 탐심에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은 고백의 언어로 읽힐 필요가 있습니다(갈 5:16). 우리는 성령의 생각과 육체의 소욕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이기에, 어떤 일에 대해 오랜 숙고를 통해 판단을 내렸어도 거기에는 우리가 가진 육체의 소욕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바울의 말씀의 의미를 헤아릴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지금은 안보의 논리를 대고, 성서의 말씀을 끌어대며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어도, 그러한 판단이 악한 소욕의 작용이었을 수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둔다면, 언젠가는 오늘의 전쟁을 성찰하면서, 이 전쟁을 한 것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고백하고 뉘우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막 4:12).
우리가 범하는 많은 오류들은 성서를 잘못 읽는 데서 발생합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인식하는 것과 아울러 성서를,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인식하려는 노력을 함께 기울여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성서를 자기 정당화의 구실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인식하려는 태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다양한 요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더러는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린다 (…) 더러는 흙이 얕아 금새 말라버린다 (…) 더러는 가시떨기 때문에 기운이 막혀서 시들어 버린다.”(막 4:4-8) 이는 우리가 세상의 악에 의해, 우리 자신의 편견에 의해, 또는 우리의 사심 따위의 육체의 소욕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 결과는 치명적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하나님 나라 안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먼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막 10:12; 갈 5:21). 성서를 가지고 전쟁을 옹호하는 일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성서는 모든 민족이 연대하여 생명과 평화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호영 목사)
2025년 6월 15일 주일예배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
신 30:15-20; 갈 5:16-26; 막 4:1-20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이란의 핵 시설에 대한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이 촉발시킨 상호 보복 공격으로 중동 지역 분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안보 논리를 내세워 이란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협상과 같은 평화로운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인종청소 수준의 살육을 자행해온 터여서, 또 다시 군사적 해결책을 선택한 이스라엘을 용납하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물론 전쟁은 매우 복합적인 원인을 갖는 사안이어서, 섣부른 판단은 피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일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괴리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습니다. 평화에 대한 성서의 말씀은 덮어놓고 전쟁을 정당화하는 구절을 뽑아내는 그들의 입장을 지지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육체의 소욕과 탐심에 미혹 받는 존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는 이유에 대해 우리 나름의 성찰을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번 전쟁의 배경에는, 성령의 이끄심이 아니라 육체의 소욕을 따른 이스라엘의 신앙적 실패가 놓여 있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쟁의 원인을 신앙의 실패에서 찾는다는 말이 설득력이 떨어질는지 몰라도, 신앙의 문제가 우리의 삶에 질적인 차이를 야기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전쟁을 하기로 한 것은 최선(最善)의 선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차악(次惡)을, 아니 최악(最惡)을 선택한 것일 뿐입니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 30:19) 이스라엘은 살기 위하여 전쟁을 선택했다고, 곧 자신들이 선택한 것이 궁극적으로는 생명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남을 죽이고 내가 사는 일이 생명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소욕과 탐심에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은 고백의 언어로 읽힐 필요가 있습니다(갈 5:16). 우리는 성령의 생각과 육체의 소욕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이기에, 어떤 일에 대해 오랜 숙고를 통해 판단을 내렸어도 거기에는 우리가 가진 육체의 소욕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바울의 말씀의 의미를 헤아릴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지금은 안보의 논리를 대고, 성서의 말씀을 끌어대며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어도, 그러한 판단이 악한 소욕의 작용이었을 수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둔다면, 언젠가는 오늘의 전쟁을 성찰하면서, 이 전쟁을 한 것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고백하고 뉘우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막 4:12).
우리가 범하는 많은 오류들은 성서를 잘못 읽는 데서 발생합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인식하는 것과 아울러 성서를,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인식하려는 노력을 함께 기울여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성서를 자기 정당화의 구실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인식하려는 태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다양한 요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더러는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린다 (…) 더러는 흙이 얕아 금새 말라버린다 (…) 더러는 가시떨기 때문에 기운이 막혀서 시들어 버린다.”(막 4:4-8) 이는 우리가 세상의 악에 의해, 우리 자신의 편견에 의해, 또는 우리의 사심 따위의 육체의 소욕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 결과는 치명적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하나님 나라 안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먼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막 10:12; 갈 5:21). 성서를 가지고 전쟁을 옹호하는 일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성서는 모든 민족이 연대하여 생명과 평화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