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25일 주일예배
부활절 여섯째 주일
왕하 2:1-15; 엡 4:1-16; 요 14:1-14
하나님은 어디 계시니이까
예수 그리스도 승천일이 가깝습니다. 오늘 읽은 세 개의 성서 본문이 승천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기울여 들어봅시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길갈에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낀 엘리야가 엘리사를 떼어 놓고 홀로 떠나려고 합니다.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왕하 2:2) 그러나 엘리사는 엘리야와 함께 가겠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2:2) 그래서 엘리야는 엘리사와 함께 벧엘까지 갑니다. 엘리야는 벧엘에서도 엘리사를 떼어놓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엘리사는 엘리야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같은 일이 여리고에서 한 번 더 반복됩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마지막으로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지를 물었을 때,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가 갑절로 자신에게 나타나게 해달라고 대답합니다. 엘리야는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말해줍니다.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2:10) 잠시 후 불수레와 불말이 나타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고,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갑니다. 홀로 남겨진 엘리사는 땅에 떨어진 엘리야의 옷 조각을 주워 요단 언덕에 올라서서, 그것으로 물을 내리치며 소리칩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2:14) 이에 물이 이리저리 튀어 길이 났고, 엘리사는 그 길로 물을 건너갑니다.
이와 같은 열왕기하 본문의 핵심은, 엘리야를 끝까지 붙좇았던 엘리사가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말대로, 엘리사가 엘리야가 승천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과 엘리야의 옷조각으로 물을 쳐서 길을 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엘리사에게서 성령이 역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승천일과 관련해서 볼 때, 이 이야기의 메시지는, 엘리야의 승천을 예감한 엘리사가 엘리야 없이 헤쳐 나가야 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보는 데서 발견됩니다. 엘리사는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상황이 엘리야보다 더 큰 능력이 있어야 극복할 수 있는 위기 상황이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그 능력을 얻기 위해 끝까지 엘리야 곁에 머물렀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스승의 부재를 예감하고 앞날을 걱정한 엘리사의 모습이 빌립에게서 겹쳐집니다. 그는 아버지께 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걱정에 사로잡힙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빌립의 간청에서 예수님이 자신들 곁에 계시지 않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지금까지 예수님을 통해 꿈꾸었던 일들이 허무하게 끝날지 모른다는 염려가 묻어납니다. 그것은 늘 함께 했던 사람과 영영 떨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두려움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우리의 빛이며 도움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어느 수도자의 말입니다.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자신의 깊은 내면의 갈망을 따라 정화의 길을 거칩니다. 그렇게 고통을 넘어 정화를 이뤄가는 영혼은 조금씩 자신의 어둠 안에서 자신을 인도하는 빛을 보게 됩니다.”(Augustin Guillerand) 엘리사와 빌립은 스승이 곁에 없는 상황을 두려워하지만, 실은 ‘그 두려움으로’ 자신들을 인도하는 빛을 구하게 되고, 그 빛에 점점 눈이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분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분이 부재한 현실이 더 크게 인식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의지할 존재가 없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이 우리를 빛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모든 사람과 연결돼 있으며, 당신의 사람들을 도와주고 계십니다(요 14:14, 엡 4:7).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그 마음에 은혜와 사랑이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오호영 목사)
2025년 5월 25일 주일예배
부활절 여섯째 주일
왕하 2:1-15; 엡 4:1-16; 요 14:1-14
하나님은 어디 계시니이까
예수 그리스도 승천일이 가깝습니다. 오늘 읽은 세 개의 성서 본문이 승천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기울여 들어봅시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길갈에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낀 엘리야가 엘리사를 떼어 놓고 홀로 떠나려고 합니다.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왕하 2:2) 그러나 엘리사는 엘리야와 함께 가겠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2:2) 그래서 엘리야는 엘리사와 함께 벧엘까지 갑니다. 엘리야는 벧엘에서도 엘리사를 떼어놓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엘리사는 엘리야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같은 일이 여리고에서 한 번 더 반복됩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마지막으로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지를 물었을 때,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가 갑절로 자신에게 나타나게 해달라고 대답합니다. 엘리야는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말해줍니다.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2:10) 잠시 후 불수레와 불말이 나타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고,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갑니다. 홀로 남겨진 엘리사는 땅에 떨어진 엘리야의 옷 조각을 주워 요단 언덕에 올라서서, 그것으로 물을 내리치며 소리칩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2:14) 이에 물이 이리저리 튀어 길이 났고, 엘리사는 그 길로 물을 건너갑니다.
이와 같은 열왕기하 본문의 핵심은, 엘리야를 끝까지 붙좇았던 엘리사가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말대로, 엘리사가 엘리야가 승천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과 엘리야의 옷조각으로 물을 쳐서 길을 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엘리사에게서 성령이 역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승천일과 관련해서 볼 때, 이 이야기의 메시지는, 엘리야의 승천을 예감한 엘리사가 엘리야 없이 헤쳐 나가야 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보는 데서 발견됩니다. 엘리사는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상황이 엘리야보다 더 큰 능력이 있어야 극복할 수 있는 위기 상황이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그 능력을 얻기 위해 끝까지 엘리야 곁에 머물렀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스승의 부재를 예감하고 앞날을 걱정한 엘리사의 모습이 빌립에게서 겹쳐집니다. 그는 아버지께 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걱정에 사로잡힙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빌립의 간청에서 예수님이 자신들 곁에 계시지 않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지금까지 예수님을 통해 꿈꾸었던 일들이 허무하게 끝날지 모른다는 염려가 묻어납니다. 그것은 늘 함께 했던 사람과 영영 떨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두려움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우리의 빛이며 도움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어느 수도자의 말입니다.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자신의 깊은 내면의 갈망을 따라 정화의 길을 거칩니다. 그렇게 고통을 넘어 정화를 이뤄가는 영혼은 조금씩 자신의 어둠 안에서 자신을 인도하는 빛을 보게 됩니다.”(Augustin Guillerand) 엘리사와 빌립은 스승이 곁에 없는 상황을 두려워하지만, 실은 ‘그 두려움으로’ 자신들을 인도하는 빛을 구하게 되고, 그 빛에 점점 눈이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분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분이 부재한 현실이 더 크게 인식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의지할 존재가 없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이 우리를 빛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모든 사람과 연결돼 있으며, 당신의 사람들을 도와주고 계십니다(요 14:14, 엡 4:7).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그 마음에 은혜와 사랑이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