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11일 주일예배
부활절 넷째 주일
사 25:1-9; 고후 4:7-18; 요 5:19-29
가리개와 덮개를 제하시며
오늘 이사야 25장 본문에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포학한 자들의 성읍을 무너뜨리셔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의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일은 포학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두려워 떨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빈궁한 사람들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보호해 주셨습니다. 친히 그들의 요새가 되어주셔서 포학한 자들의 무자비한 공격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예언자가 노래하는 이 일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제국의 공격을 견딜 수 있었던 까닭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바벨론이 무너진다는 것은 좀처럼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바벨론은 너무나 강했고, 온 세상이 그들의 포학함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기사(奇事)로 그 포학한 나라를 심판하셨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언자의 노래는 하나님이 열어주실 미래의 소망으로 넘어갑니다.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서로 전쟁을 일삼고, 서로에게 무자비한 일을 행하고 있지만, 언젠가 하나님의 날이 오면, 하나님 앞에 다함께 모여서 화해의 잔치를 갖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잔치는 ‘하나님의 산’에서 마련될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오랜 믿음에 따르면, 하나님의 산은 사람이 함부로 올라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먼지와 티끌로 덮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산을 경외심을 갖고 우러러 봐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산에 올라온 모든 민족의 얼굴에서 가리개와 덮개를 제하실 것입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고,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실 것입니다(사 25:7-8). 당신의 백성과 모든 민족에 대한 구원을 완성하시는 순간입니다. 그 가리개와 덮개가 민족들의 얼굴에서 제하여짐으로써 민족들의 화해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인간은 쉽게 눈이 머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돈에 눈이 멀기도 하고, 권력에 눈이 멀기도 합니다. 때로는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으로 인해 편견을 갖기도 하고, 이념이나 의심으로 인해 색안경을 끼고 모든 것을 제멋대로 재단해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 가리개와 덮개가 세상 사람들의 얼굴에 덮여 있습니다. 만약 그 가리개와 덮개를 벗게 된다면, 인간은 모든 것을 온전하게 볼 수 있을 것이고, 올바르게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서울을 떠나 시골에 내려가 살면서, 자신의 ‘눈’이 바뀌고, ‘삶’이 달라졌다는 어떤 분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도시에서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던 때에는 세상이 온통 가시들로 무장한 나무들 같았고, 모두가 얼음송곳으로 서로를 찔러 대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살려면 네가 죽어야 하고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 공중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가까이 경험하는 곳에 살게 되면서, 이 세상이 미움과 폭력으로 가득한 곳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 하나의 씨앗이 얼마나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 작은 씨앗이 자랄 수 있도록 흙과 물과 공기와 햇볕이 얼마나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 이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매 순간 배웁니다.”(송민원, 『Jesus for you』, 208-209)
우리의 얼굴에도 가리개와 덮개가 씌워져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진심을 보지 못할 때가 많고, 서로에게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 가리개와 덮개를 살짝 치우고서 사람과 세상을 보려고 노력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교회를 박해의 대상에서 세상의 생명으로 바라보게 된 사도 바울과 쉼 없이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당신의 온 삶을 하나님께 드리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런 가리개와 덮개 없이 세상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고후 4:14, 요 5:19).
(오호영 목사)
2025년 5월 11일 주일예배
부활절 넷째 주일
사 25:1-9; 고후 4:7-18; 요 5:19-29
가리개와 덮개를 제하시며
오늘 이사야 25장 본문에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포학한 자들의 성읍을 무너뜨리셔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의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일은 포학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두려워 떨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빈궁한 사람들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보호해 주셨습니다. 친히 그들의 요새가 되어주셔서 포학한 자들의 무자비한 공격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예언자가 노래하는 이 일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제국의 공격을 견딜 수 있었던 까닭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바벨론이 무너진다는 것은 좀처럼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바벨론은 너무나 강했고, 온 세상이 그들의 포학함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기사(奇事)로 그 포학한 나라를 심판하셨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언자의 노래는 하나님이 열어주실 미래의 소망으로 넘어갑니다.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서로 전쟁을 일삼고, 서로에게 무자비한 일을 행하고 있지만, 언젠가 하나님의 날이 오면, 하나님 앞에 다함께 모여서 화해의 잔치를 갖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잔치는 ‘하나님의 산’에서 마련될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오랜 믿음에 따르면, 하나님의 산은 사람이 함부로 올라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먼지와 티끌로 덮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산을 경외심을 갖고 우러러 봐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산에 올라온 모든 민족의 얼굴에서 가리개와 덮개를 제하실 것입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고,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실 것입니다(사 25:7-8). 당신의 백성과 모든 민족에 대한 구원을 완성하시는 순간입니다. 그 가리개와 덮개가 민족들의 얼굴에서 제하여짐으로써 민족들의 화해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인간은 쉽게 눈이 머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돈에 눈이 멀기도 하고, 권력에 눈이 멀기도 합니다. 때로는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으로 인해 편견을 갖기도 하고, 이념이나 의심으로 인해 색안경을 끼고 모든 것을 제멋대로 재단해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 가리개와 덮개가 세상 사람들의 얼굴에 덮여 있습니다. 만약 그 가리개와 덮개를 벗게 된다면, 인간은 모든 것을 온전하게 볼 수 있을 것이고, 올바르게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서울을 떠나 시골에 내려가 살면서, 자신의 ‘눈’이 바뀌고, ‘삶’이 달라졌다는 어떤 분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도시에서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던 때에는 세상이 온통 가시들로 무장한 나무들 같았고, 모두가 얼음송곳으로 서로를 찔러 대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살려면 네가 죽어야 하고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 공중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가까이 경험하는 곳에 살게 되면서, 이 세상이 미움과 폭력으로 가득한 곳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 하나의 씨앗이 얼마나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 작은 씨앗이 자랄 수 있도록 흙과 물과 공기와 햇볕이 얼마나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 이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매 순간 배웁니다.”(송민원, 『Jesus for you』, 208-209)
우리의 얼굴에도 가리개와 덮개가 씌워져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진심을 보지 못할 때가 많고, 서로에게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 가리개와 덮개를 살짝 치우고서 사람과 세상을 보려고 노력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교회를 박해의 대상에서 세상의 생명으로 바라보게 된 사도 바울과 쉼 없이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당신의 온 삶을 하나님께 드리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런 가리개와 덮개 없이 세상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고후 4:14, 요 5:19).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