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16일 주일예배
사순절 둘째 주일
전 5:10-20; 약 1:2-11; 막 10:17-31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
한 사람이 다급하게 달려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질문을 드렸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 10:17). 그의 모습에서 무엇을 보셨는지, 예수님은 그가 사용한 호칭부터 바로잡으셨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기 때문에 당신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성서학자 중에는 그 사람이 예수님께 급히 달려온 것이 “그가 [영생이라는] 절박한 고민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크레이그 에번스). 그러나 그의 다급한 모습은 영생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가리키셨을 때에 의아해하는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20절에 기록된 그의 말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켜왔음에도 아직 저는 영생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 사람을 비난하려고 그의 소유욕을 조명하는 건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라는 말씀 때문에도 그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10:21). 오히려 그 성격을 분명히 하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위해 하나님의 계명도 지키고, 세상의 재물도 지키려 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서도, 자기의 많은 재물을 통해서도, 그가 영생이라고 말하는 궁극적인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영생으로 이끌어주려 하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도록 불러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너의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오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영생에 들어가는 것보다 재물을 통해 현세의 삶을 보장 받으려는 마음이 더 컸던 것입니다.
“네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는 것보다는 재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라는 뜻으로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가운데 언제나 첫 번째로 꼽히는 덕목은 ‘가난’인데, 무엇보다 재물의 얽매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사람들과 삶을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으로 가득하셨던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삶의 방식을 본받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난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재물로부터의 자유와 탐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선물이 주어집니다. 달리 말하면, 재물이 상징하는 현세적 가치에 이끌리는 삶으로부터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 하고 말씀합니다. ‘헛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헤벨’(הֶבֶל)로 '입김'이나 ‘수증기’를 뜻하는 말입니다. 시편 62편의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9)에서 ‘입김’으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헤벨’입니다. 중요한 것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그 속성'입니다(송민원, 『지혜란 무엇인가』, 194). 그러니까 전도자는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재물을 어떻게 대하는 게 지혜로운 태도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해가 되도록 재물을 소유하려는 사람, 재물을 쌓느라 삶의 낙을 잃어버린 사람의 경우처럼 재물이 화의 원인이 되고 있다면, 그 재물을 다 팔아버리는 게 나을 것입니다. 오히려 영원한 가치를 갖는 일을 찾아서 삶의 보람과 낙을 누리는 게 훨씬 더 지혜로운 삶일 것입니다.
사람의 일생도, 그가 소유한 모든 것도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입김입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은 떨어지고 그 아름다움은 없어집니다. 그처럼 모든 것은 쇠잔할 것입니다(약 1:10-11). ‘헤벨’을 움켜쥔 두 손을 펼치게 해줄 지혜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참된 자유로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보람과 기쁨을 함께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오호영 목사)
2025년 3월 16일 주일예배
사순절 둘째 주일
전 5:10-20; 약 1:2-11; 막 10:17-31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
한 사람이 다급하게 달려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질문을 드렸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 10:17). 그의 모습에서 무엇을 보셨는지, 예수님은 그가 사용한 호칭부터 바로잡으셨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기 때문에 당신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성서학자 중에는 그 사람이 예수님께 급히 달려온 것이 “그가 [영생이라는] 절박한 고민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크레이그 에번스). 그러나 그의 다급한 모습은 영생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가리키셨을 때에 의아해하는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20절에 기록된 그의 말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켜왔음에도 아직 저는 영생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 사람을 비난하려고 그의 소유욕을 조명하는 건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라는 말씀 때문에도 그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10:21). 오히려 그 성격을 분명히 하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위해 하나님의 계명도 지키고, 세상의 재물도 지키려 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서도, 자기의 많은 재물을 통해서도, 그가 영생이라고 말하는 궁극적인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영생으로 이끌어주려 하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도록 불러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너의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오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영생에 들어가는 것보다 재물을 통해 현세의 삶을 보장 받으려는 마음이 더 컸던 것입니다.
“네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는 것보다는 재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라는 뜻으로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가운데 언제나 첫 번째로 꼽히는 덕목은 ‘가난’인데, 무엇보다 재물의 얽매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사람들과 삶을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으로 가득하셨던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삶의 방식을 본받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난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재물로부터의 자유와 탐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선물이 주어집니다. 달리 말하면, 재물이 상징하는 현세적 가치에 이끌리는 삶으로부터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 하고 말씀합니다. ‘헛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헤벨’(הֶבֶל)로 '입김'이나 ‘수증기’를 뜻하는 말입니다. 시편 62편의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9)에서 ‘입김’으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헤벨’입니다. 중요한 것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그 속성'입니다(송민원, 『지혜란 무엇인가』, 194). 그러니까 전도자는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재물을 어떻게 대하는 게 지혜로운 태도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해가 되도록 재물을 소유하려는 사람, 재물을 쌓느라 삶의 낙을 잃어버린 사람의 경우처럼 재물이 화의 원인이 되고 있다면, 그 재물을 다 팔아버리는 게 나을 것입니다. 오히려 영원한 가치를 갖는 일을 찾아서 삶의 보람과 낙을 누리는 게 훨씬 더 지혜로운 삶일 것입니다.
사람의 일생도, 그가 소유한 모든 것도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입김입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은 떨어지고 그 아름다움은 없어집니다. 그처럼 모든 것은 쇠잔할 것입니다(약 1:10-11). ‘헤벨’을 움켜쥔 두 손을 펼치게 해줄 지혜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참된 자유로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보람과 기쁨을 함께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