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9일 주일예배
사순절 첫째 주일
사 58:1-9; 고후 7:2-13; 마 6:16-18
회개를 이루는 근심을
초기 교회에서 사순절의 주된 목표는 부활절 세례 지원자들을 준비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옛 사람으로서는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세례로 나아가는 과정이 사순절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았다고 옛 삶의 악습이 저절로 극복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도 사순절은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으로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죄의 유혹에 흔들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적 나약함을 극복하려고 분투하는 회개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한 예배학자는 그러한 사순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려는 끈질긴 노력이다.”(슈메만, 『대사순절』, 22) 교회력이 사순절 첫째 주일에 금식과 관련된 말씀을 제시하는 데에도 그와 같은 신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금식이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개인의 자발적인 금욕에 속하고, 무엇보다 회개의 의지를 표현하는 종교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금식 자체보다는 위선자들의 자기 과시 내지는 가식과 싸우도록 하는 데 그 초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에는 금식에 관한 하나의 분명한 규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올바른 금식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보이려는 동기로 행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마 6:18). 사람에게 보이려는 동기가 작용하면 금식은 위선과 가식의 무익한 행위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금식을 하려는 사람은 그 사실을 사람에게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금식하는 것을 드러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금식을 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이 공동체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다 함께 금식을 한 것처럼 말입니다(에스라 8장 참조). 함께 하는 금식에서 중요한 점 역시 위선의 위험을 피하는 데 있습니다. 이때의 위선이란 사회적 차원의 위선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사회적 위선은 오직 금식의 원인이 된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방지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서가 보여주는 이스라엘 백성의 금식에는 바로 그 노력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고, 일꾼들을 압제했습니다. 베옷을 입고, 재를 깔고 앉은 자리에서도 소유를 늘릴 생각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금식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사 58:5)
사도 바울의 말씀에는 함께 하는 금식에 임하는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견책을 달게 듣고, 그의 조언에 따라 교회 공동체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깨달은 사실입니다. 일전에 바울은 편지를 써서, 사역자들을 비교하고 비난하며, 서로 분열한 고린도 교인들을 꾸짖은 적이 있습니다. 그 후 바울은 오랫동안 근심에 시달렸는데,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에서 돌아온 디도에게서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의 말을 달게 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마음을 놓게 됩니다. 바울은 그런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고후 7:10).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7:11) 공동체의 위기가 몰고 온 근심을 공동체 회복의 동력으로 삼은 놀라운 장면입니다.
내란수괴 혐의자의 석방으로 속을 태워야 하는 현실이지만, 그로 인해 내란 극복에 대한 염원은 더욱 크게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일종의 사회적 금식에 임하고 있는 우리의 근심이 우리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힘의 원천이 되도록 오늘 읽은 모든 말씀을 깊이 유념하도록 합시다.
(오호영 목사)
2025년 3월 9일 주일예배
사순절 첫째 주일
사 58:1-9; 고후 7:2-13; 마 6:16-18
회개를 이루는 근심을
초기 교회에서 사순절의 주된 목표는 부활절 세례 지원자들을 준비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옛 사람으로서는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세례로 나아가는 과정이 사순절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았다고 옛 삶의 악습이 저절로 극복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도 사순절은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으로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죄의 유혹에 흔들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적 나약함을 극복하려고 분투하는 회개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한 예배학자는 그러한 사순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려는 끈질긴 노력이다.”(슈메만, 『대사순절』, 22) 교회력이 사순절 첫째 주일에 금식과 관련된 말씀을 제시하는 데에도 그와 같은 신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금식이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개인의 자발적인 금욕에 속하고, 무엇보다 회개의 의지를 표현하는 종교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금식 자체보다는 위선자들의 자기 과시 내지는 가식과 싸우도록 하는 데 그 초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에는 금식에 관한 하나의 분명한 규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올바른 금식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보이려는 동기로 행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마 6:18). 사람에게 보이려는 동기가 작용하면 금식은 위선과 가식의 무익한 행위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금식을 하려는 사람은 그 사실을 사람에게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금식하는 것을 드러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금식을 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이 공동체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다 함께 금식을 한 것처럼 말입니다(에스라 8장 참조). 함께 하는 금식에서 중요한 점 역시 위선의 위험을 피하는 데 있습니다. 이때의 위선이란 사회적 차원의 위선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사회적 위선은 오직 금식의 원인이 된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방지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서가 보여주는 이스라엘 백성의 금식에는 바로 그 노력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고, 일꾼들을 압제했습니다. 베옷을 입고, 재를 깔고 앉은 자리에서도 소유를 늘릴 생각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금식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사 58:5)
사도 바울의 말씀에는 함께 하는 금식에 임하는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견책을 달게 듣고, 그의 조언에 따라 교회 공동체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깨달은 사실입니다. 일전에 바울은 편지를 써서, 사역자들을 비교하고 비난하며, 서로 분열한 고린도 교인들을 꾸짖은 적이 있습니다. 그 후 바울은 오랫동안 근심에 시달렸는데, 자신의 말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에서 돌아온 디도에게서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의 말을 달게 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마음을 놓게 됩니다. 바울은 그런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고후 7:10).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7:11) 공동체의 위기가 몰고 온 근심을 공동체 회복의 동력으로 삼은 놀라운 장면입니다.
내란수괴 혐의자의 석방으로 속을 태워야 하는 현실이지만, 그로 인해 내란 극복에 대한 염원은 더욱 크게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일종의 사회적 금식에 임하고 있는 우리의 근심이 우리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힘의 원천이 되도록 오늘 읽은 모든 말씀을 깊이 유념하도록 합시다.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