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6일 주일예배
주현절 셋째 주일
신 10:12-22; 딤전 1:1-11; 마 5:17-20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요구를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 사랑하며, 마음과 뜻을 다하여 섬기고,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는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도 권고합니다. ‘목이 곧다’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것을 보셨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서 나타납니다(출 32:9 참조). 아무런 망설임 없이 우상을 만들어내는 모습에서 당신을 거역하는 이스라엘의 교만을 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인구도 어지간히 많아졌고 힘도 더 세졌습니다. 커진 힘은 자신감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에게서 힘은 교만의 뿌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이스라엘의 가난한 사람들과 연관된 부분입니다. 강해진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고아와 과부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가난한 거류민을 가혹하게 대하는 경향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교만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극심한 가난과 무서운 학대에서 겨우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강자의 논리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이스라엘의 교만과 유사한 행태가 관찰됩니다. 권력자를 맹목적으로 편들고, 심지어 그의 범죄마저도 두둔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요즈음 태극기부대의 집회 모습을 보면, 그 규모가 전보다 훨씬 더 커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찾아와서 몸을 낮추는 그들의 집회에는 정말로 힘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집회에는 내란 우두머리 피의자인 대통령을 두둔하는 말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의 만행에 짓밟힌 국민의 주권과 민주주의 붕괴를 염려하는 소리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특히 그들의 부정선거 음모론은 중국인에 대한 혐오를 바탕에 깔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중국인들의 신변 안전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염려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이 기독교인들에게는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역사와 삶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경륜’(oikonomian theou)을 따라가지 않는 잘못을 경고합니다. 경륜이란 ‘오이코노미아’란 말로, “피조세계에 질서(cosmos)를 주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총체적인 활동”을 뜻합니다.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율법 해석과 관련된 무익한 사색에 빠져서, 신자들이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참여하도록 돕는 일을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와 신자들을 하나님의 경륜으로 이끌어주지 않고, 지식의 유희만 가득한 모임에 머물게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선생”(딤전 1:7)이 되려 하지만 하나님의 경륜에서는 멀리 떨어진 자들입니다.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를 비롯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과 가깝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신 10:17-18, 딤전 1:5-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바리새인의 의에 갇히지 않도록 경계시키셨습니다(마 5:20). 바리새인은 선과 악에 대한 지식만이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서 모든 것을 심판하려는 ‘분열의 사람’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디트리히 본회퍼). 심판을 통해 모든 것을 구별하고, 나누고, 흩어버리는 사람, 그가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타자를 자신과 동질화(Homogenisierung)시키려는 바리새인들의 의도는, 한편으로는 동질화되지 않는 사람들을 ‘추방’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내란을 일으킨 권력자, 또한 법원을 파괴하고, 기자들을 폭행한 폭도들, 자신의 기도와 말에 혐오와 폭력의 언어를 한가득 담아내는 목사들과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그런 동질화가 초래한 추방의 행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렇게 추방되셨고, 폭행 당하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들이 모든 바리새인적 교만과 위선과 분열의 미혹을 물리치고,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딤전 1:5)을 실현하도록 우리 모두를 이끌어주기를 소망합니다.
(오호영 목사)
2025년 1월 26일 주일예배
주현절 셋째 주일
신 10:12-22; 딤전 1:1-11; 마 5:17-20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요구를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 사랑하며, 마음과 뜻을 다하여 섬기고,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는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도 권고합니다. ‘목이 곧다’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것을 보셨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서 나타납니다(출 32:9 참조). 아무런 망설임 없이 우상을 만들어내는 모습에서 당신을 거역하는 이스라엘의 교만을 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인구도 어지간히 많아졌고 힘도 더 세졌습니다. 커진 힘은 자신감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에게서 힘은 교만의 뿌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이스라엘의 가난한 사람들과 연관된 부분입니다. 강해진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고아와 과부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가난한 거류민을 가혹하게 대하는 경향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교만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극심한 가난과 무서운 학대에서 겨우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강자의 논리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이스라엘의 교만과 유사한 행태가 관찰됩니다. 권력자를 맹목적으로 편들고, 심지어 그의 범죄마저도 두둔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요즈음 태극기부대의 집회 모습을 보면, 그 규모가 전보다 훨씬 더 커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찾아와서 몸을 낮추는 그들의 집회에는 정말로 힘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집회에는 내란 우두머리 피의자인 대통령을 두둔하는 말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의 만행에 짓밟힌 국민의 주권과 민주주의 붕괴를 염려하는 소리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특히 그들의 부정선거 음모론은 중국인에 대한 혐오를 바탕에 깔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중국인들의 신변 안전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염려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이 기독교인들에게는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역사와 삶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경륜’(oikonomian theou)을 따라가지 않는 잘못을 경고합니다. 경륜이란 ‘오이코노미아’란 말로, “피조세계에 질서(cosmos)를 주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총체적인 활동”을 뜻합니다.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율법 해석과 관련된 무익한 사색에 빠져서, 신자들이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참여하도록 돕는 일을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와 신자들을 하나님의 경륜으로 이끌어주지 않고, 지식의 유희만 가득한 모임에 머물게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선생”(딤전 1:7)이 되려 하지만 하나님의 경륜에서는 멀리 떨어진 자들입니다.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를 비롯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과 가깝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신 10:17-18, 딤전 1:5-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바리새인의 의에 갇히지 않도록 경계시키셨습니다(마 5:20). 바리새인은 선과 악에 대한 지식만이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서 모든 것을 심판하려는 ‘분열의 사람’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디트리히 본회퍼). 심판을 통해 모든 것을 구별하고, 나누고, 흩어버리는 사람, 그가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타자를 자신과 동질화(Homogenisierung)시키려는 바리새인들의 의도는, 한편으로는 동질화되지 않는 사람들을 ‘추방’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내란을 일으킨 권력자, 또한 법원을 파괴하고, 기자들을 폭행한 폭도들, 자신의 기도와 말에 혐오와 폭력의 언어를 한가득 담아내는 목사들과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그런 동질화가 초래한 추방의 행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렇게 추방되셨고, 폭행 당하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들이 모든 바리새인적 교만과 위선과 분열의 미혹을 물리치고,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딤전 1:5)을 실현하도록 우리 모두를 이끌어주기를 소망합니다.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