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5일 주일예배
성탄절 둘째 주일 / 새해주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사 66:18-23; 계 21:22-22:5; 마 3:13-17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려는 예수님을 만류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 그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보다 ‘더 큰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베푼다는 건 세례 받는 사람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요구했고, 그 다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회개를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히 4:15 참조). 예수님 앞에서는 세례 요한도 자기 죄를 자복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만류에도 예수님은 그에게 세례를 받고자 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말씀하신 ‘의’(δικαιοσύνη)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신 것, 인간에게 행하도록 부과하신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울리히 루츠, 『마태공동체의 예수 이야기』, 55).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을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로 이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인 까닭도 그와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허하게 세례를 받으러 내려감으로써, 그리고 요한은 자기보다 더 큰 분에게 용감하게 세례를 베풂으로써 각각 하나님의 의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분들은 하나님의 의 앞에서 누가 더 큰 자이고, 누가 더 작은 자인지, 누가 누구 앞에서 회개를 해야 하는지 분간하는 것을 중지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묵묵히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를 통해 말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에 철저히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3:17)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그분의 순종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의를 따르는 길을 신앙공동체에 가르쳐 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무엇 때문에 ‘더 큰 자’가 ‘더 작은 자’에게 세례를 받는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명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게 그 대답입니다. 마태복음 4장 광야에서의 시험 이야기에서도 같은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가지고 유혹해 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4:3, 4:6, 4:9도 참조) 그러나 예수님은 한순간도 하나님의 의를 잊지 않습니다. 모든 수고와 고난과 죽음까지 감내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향한 길을 고수하실 뿐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의 의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해 자기보다 작은 자에게도 순종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순종입니다. 세상은 그와 같은 하나님 아들의 순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상명하복 식의 순종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똑바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아들처럼 순종하는 것은 세상 앞에 놓인 과제이자, 세상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 이사야 예언자는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으로 하여금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사 66:18).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대동(大同)의 세상을 ‘하나님의 의’로 선포한 것입니다(66:23). 이방인들을 거부해온 이스라엘의 뿌리 깊은 차별(선민)의식의 극복, 기득권을 만드는 적서(嫡庶) 차별의 논리를 물리치도록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강자들은 여전히 약자들을 차별하고 지배할 생각뿐입니다. 그들의 탐욕에 세상이 망가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의는 세상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겸손하고 용기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오호영 목사)
2025년 1월 5일 주일예배
성탄절 둘째 주일 / 새해주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사 66:18-23; 계 21:22-22:5; 마 3:13-17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려는 예수님을 만류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 그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보다 ‘더 큰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베푼다는 건 세례 받는 사람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요구했고, 그 다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회개를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히 4:15 참조). 예수님 앞에서는 세례 요한도 자기 죄를 자복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만류에도 예수님은 그에게 세례를 받고자 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말씀하신 ‘의’(δικαιοσύνη)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신 것, 인간에게 행하도록 부과하신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울리히 루츠, 『마태공동체의 예수 이야기』, 55).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을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로 이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인 까닭도 그와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허하게 세례를 받으러 내려감으로써, 그리고 요한은 자기보다 더 큰 분에게 용감하게 세례를 베풂으로써 각각 하나님의 의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분들은 하나님의 의 앞에서 누가 더 큰 자이고, 누가 더 작은 자인지, 누가 누구 앞에서 회개를 해야 하는지 분간하는 것을 중지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묵묵히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를 통해 말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에 철저히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3:17)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그분의 순종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의를 따르는 길을 신앙공동체에 가르쳐 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무엇 때문에 ‘더 큰 자’가 ‘더 작은 자’에게 세례를 받는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명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게 그 대답입니다. 마태복음 4장 광야에서의 시험 이야기에서도 같은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가지고 유혹해 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4:3, 4:6, 4:9도 참조) 그러나 예수님은 한순간도 하나님의 의를 잊지 않습니다. 모든 수고와 고난과 죽음까지 감내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향한 길을 고수하실 뿐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의 의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해 자기보다 작은 자에게도 순종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순종입니다. 세상은 그와 같은 하나님 아들의 순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상명하복 식의 순종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똑바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아들처럼 순종하는 것은 세상 앞에 놓인 과제이자, 세상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 이사야 예언자는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으로 하여금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사 66:18).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대동(大同)의 세상을 ‘하나님의 의’로 선포한 것입니다(66:23). 이방인들을 거부해온 이스라엘의 뿌리 깊은 차별(선민)의식의 극복, 기득권을 만드는 적서(嫡庶) 차별의 논리를 물리치도록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강자들은 여전히 약자들을 차별하고 지배할 생각뿐입니다. 그들의 탐욕에 세상이 망가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의는 세상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겸손하고 용기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