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9일 주일예배
성탄절 첫째 주일 / 송년주일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삼상 1:19-28; 히 2:9-18; 눅 2:41-52
비범한 인물에 대한 전기는 가끔 그 사람의 소년기 일화나 그가 받은 교육에 대해서도 기록하곤 합니다. 플루타르코스(Plutarch)는 로마의 부정부패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일평생 로마 황제와 싸운 카토(Cato)가 어린 시절 놀이에서 부당하게 감옥에 갇힌 친구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일화를 전합니다. 카토가 정의로운 성정을 타고난 인물이라는 걸 보여주려 했던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서 행방불명된 소년 예수가 사흘 만에 성전에서 발견되었다는 누가복음 이야기는 예수의 지혜를 드러내며, 그가 장차 성전에서 활동하실 것을 예시해 주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David L. Balch).
그런데, 소년 예수에 관한 이 이야기에는 고대 전기물의 문학적 특징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진술이 담겨 있습니다. 사흘 만에 아들을 찾은 마리아가 얼마나 걱정했었는지를 얘기했을 때 소년 예수가 한 대답이 그것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이 말은 ‘나는 내 아버지의 일들에 있어야 합니다.’라는 뜻으로, 그 무렵 예수의 하나님 이해가 매우 깊어진 사실을 보여줍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성전에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일’을 본 것이 소년 예수가 성전에 남아 율법을 토론한 이유였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성육신하신 하나님 아들의 자의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커다란 신학적 의의를 갖습니다. 단지 소년 예수의 비범성을 말하는 이야기를 넘어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가진 진술로서 오늘 본문을 읽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예수를 고대의 영웅이나 위인, 또는 위대한 예언자나 율법 선생으로 묘사하는 건 누가복음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누가복음은 이 소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본다는 건 예수의 비범성, 인간을 초월하는 그의 신성을 봐야 한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의 의도는 그와는 다릅니다. 오히려 예수의 인간다움을 보는 것, 참 사람이신 그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통속적인 오해에 빠진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합니다. ‘예수가 정말 사람이셨는가?’ 이는 그리스도의 육체성을 부정하는 물음으로, 예수님은 인간과 같은 육체가 없으시고, 모종의 영적인 형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했던 고대 영지주의 이단의 가현설(假現說, Docetism)과 같은 것입니다. 그와 달리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물음은 예수의 인간됨, 곧 그분의 성육신에서 출발합니다. ‘참된 인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예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분의 몸, 우리와 같은 그분의 연약함을 아무런 미화 없이 가리키며, 그 육체성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을 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은 무엇보다 그분이 참 사람이신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 하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이, 인간에게 참 인간성을 덧입혀 주시는 데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인간성을 부정하거나, 육체성을 소멸시키는 방식으로서의 구원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참 인간성을 회복하게 하는 것으로서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구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인간성을 취하신 일, 그가 사람이 되신 일은 우리 구원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7-18) 오늘 일어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온 국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희생자 분들과 유가족의 아픔은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 형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처 입은 모든 사람들을 친히 안아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오호영 목사)
2024년 12월 29일 주일예배
성탄절 첫째 주일 / 송년주일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삼상 1:19-28; 히 2:9-18; 눅 2:41-52
비범한 인물에 대한 전기는 가끔 그 사람의 소년기 일화나 그가 받은 교육에 대해서도 기록하곤 합니다. 플루타르코스(Plutarch)는 로마의 부정부패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일평생 로마 황제와 싸운 카토(Cato)가 어린 시절 놀이에서 부당하게 감옥에 갇힌 친구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일화를 전합니다. 카토가 정의로운 성정을 타고난 인물이라는 걸 보여주려 했던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서 행방불명된 소년 예수가 사흘 만에 성전에서 발견되었다는 누가복음 이야기는 예수의 지혜를 드러내며, 그가 장차 성전에서 활동하실 것을 예시해 주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David L. Balch).
그런데, 소년 예수에 관한 이 이야기에는 고대 전기물의 문학적 특징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진술이 담겨 있습니다. 사흘 만에 아들을 찾은 마리아가 얼마나 걱정했었는지를 얘기했을 때 소년 예수가 한 대답이 그것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이 말은 ‘나는 내 아버지의 일들에 있어야 합니다.’라는 뜻으로, 그 무렵 예수의 하나님 이해가 매우 깊어진 사실을 보여줍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성전에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일’을 본 것이 소년 예수가 성전에 남아 율법을 토론한 이유였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성육신하신 하나님 아들의 자의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커다란 신학적 의의를 갖습니다. 단지 소년 예수의 비범성을 말하는 이야기를 넘어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가진 진술로서 오늘 본문을 읽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예수를 고대의 영웅이나 위인, 또는 위대한 예언자나 율법 선생으로 묘사하는 건 누가복음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누가복음은 이 소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본다는 건 예수의 비범성, 인간을 초월하는 그의 신성을 봐야 한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의 의도는 그와는 다릅니다. 오히려 예수의 인간다움을 보는 것, 참 사람이신 그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통속적인 오해에 빠진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합니다. ‘예수가 정말 사람이셨는가?’ 이는 그리스도의 육체성을 부정하는 물음으로, 예수님은 인간과 같은 육체가 없으시고, 모종의 영적인 형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했던 고대 영지주의 이단의 가현설(假現說, Docetism)과 같은 것입니다. 그와 달리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물음은 예수의 인간됨, 곧 그분의 성육신에서 출발합니다. ‘참된 인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예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분의 몸, 우리와 같은 그분의 연약함을 아무런 미화 없이 가리키며, 그 육체성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을 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은 무엇보다 그분이 참 사람이신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 하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이, 인간에게 참 인간성을 덧입혀 주시는 데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인간성을 부정하거나, 육체성을 소멸시키는 방식으로서의 구원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참 인간성을 회복하게 하는 것으로서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구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인간성을 취하신 일, 그가 사람이 되신 일은 우리 구원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7-18) 오늘 일어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온 국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희생자 분들과 유가족의 아픔은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 형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처 입은 모든 사람들을 친히 안아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오호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