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은 형제를 살해하는 끔찍한 죄를 범하고, 유리 방황하며 숨어서 지내야 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보복 살해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 가운데서 그야말로 평화가 없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가인은 어쩔 수 없이 죄 지을 때 외면했던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 제가 목숨을 부지하기는 했으나 불안해서 살수가 없습니다. 제게는 평화도 없고 행복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살길을 열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뜻밖에도 가인에게 자비를 베풀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창4:15)고.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형제를 살해한 무서운 죄를 범한 자를 이토록 관대하게 대하실 수 있을까? 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대로라면 당장 그의 목숨을 빼앗고, 억울하게 죽은 자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가인의 목숨은 그가 형제를 살해함으로써 이미 죽은 자나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지금 그의 생명은 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셋째, 이제부터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가인이 살게 된 이야기는 이전에 죄 짓고 용서받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이고, 모든 인류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우리 각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살아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생명 때문이요, 날마다 베풀어 주시는 자비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바로 가인에게 내린 하나님의 자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범죄한 자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할까'를 놓고 고민했으나, 예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마18:22)고 하십니다. 용서의 무한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큰 빚을 탕감 받은 자가 쥐꼬리만큼 빚진 자를 구박하고, 무자비하게 다룬 은혜를 모르는 관원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말씀은 개개인에게 부여된 자유와 그 자유의 한계에 대한 논증입니다. 개개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누리고 보존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톧상 '인권'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문명사회는 개인의 인권을 최상의 가치로 여깁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인권은 침해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같은 인권은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것인가? 사도 바울의 대답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은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7-8). 우리 각 사람은 자유의 은총을 받아 누리며 살지만, 그 같은 자유는 자기 자신만을 위함이 아니요, 남을 판단하는 자유가 아닌, 그리스도 앞에서 책임진 몸으로 살아가는 자유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 각 사람이 지닌 자유와 인권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봅니다. 우리는 범죄한 자를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인륜적인 범죄를 벌이고도 '정의의 심판' 운운하거나 그들의 행위에 동조하는 자들에게 손을 들어줄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각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자비에 힘입어 살고 있음을 자각함으로써 보복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인은 형제를 살해하는 끔찍한 죄를 범하고, 유리 방황하며 숨어서 지내야 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보복 살해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 가운데서 그야말로 평화가 없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가인은 어쩔 수 없이 죄 지을 때 외면했던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 제가 목숨을 부지하기는 했으나 불안해서 살수가 없습니다. 제게는 평화도 없고 행복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살길을 열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뜻밖에도 가인에게 자비를 베풀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창4:15)고.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형제를 살해한 무서운 죄를 범한 자를 이토록 관대하게 대하실 수 있을까? 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대로라면 당장 그의 목숨을 빼앗고, 억울하게 죽은 자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가인의 목숨은 그가 형제를 살해함으로써 이미 죽은 자나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지금 그의 생명은 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셋째, 이제부터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가인이 살게 된 이야기는 이전에 죄 짓고 용서받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이고, 모든 인류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우리 각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살아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생명 때문이요, 날마다 베풀어 주시는 자비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바로 가인에게 내린 하나님의 자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범죄한 자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할까'를 놓고 고민했으나, 예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마18:22)고 하십니다. 용서의 무한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큰 빚을 탕감 받은 자가 쥐꼬리만큼 빚진 자를 구박하고, 무자비하게 다룬 은혜를 모르는 관원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말씀은 개개인에게 부여된 자유와 그 자유의 한계에 대한 논증입니다. 개개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누리고 보존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톧상 '인권'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문명사회는 개인의 인권을 최상의 가치로 여깁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인권은 침해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같은 인권은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것인가? 사도 바울의 대답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은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7-8). 우리 각 사람은 자유의 은총을 받아 누리며 살지만, 그 같은 자유는 자기 자신만을 위함이 아니요, 남을 판단하는 자유가 아닌, 그리스도 앞에서 책임진 몸으로 살아가는 자유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 각 사람이 지닌 자유와 인권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봅니다. 우리는 범죄한 자를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인륜적인 범죄를 벌이고도 '정의의 심판' 운운하거나 그들의 행위에 동조하는 자들에게 손을 들어줄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각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자비에 힘입어 살고 있음을 자각함으로써 보복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