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스펙과 오류(삼하 7:8-16; 행 18:5-11; 막 8:10-13 / 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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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스펙은 놀랍습니다. 수금 연주의 예능적 감각, 전략과 용맹을 갖춘 무사적 기질, 시적 감성과 문사적 지성, 빼어난 외모와 ‘여호와의 영’에 감동된 인물 등은 당대 최고의 ‘훈남’을 입증하고도 남습니다! 삼하 7장은 다윗의 스펙에 방점을 찍습니다. 이른 바 나단 신탁은 네 가지로 압축됩니다. 1)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는다, 2) 성전은 정한 곳에 네 아들이 짓는다, 3) 왕은 하나님과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된다, 4) 그의 나라가 영원할 것이다.
다윗의 등극은 사무엘의 기름부음으로 예고되었습니다. 골리앗을 물리치고 단숨에 사울의 품에 안기지만 다윗은 사울의 견제와 집요한 추격을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다윗은 떠돌다 블레셋의 용병이 됩니다(삼상 28:1-2). 후에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으로 추대되고 그 사이 사울과 세 아들은 전사합니다(삼하 2:11). 이스보셋이 사울의 뒤를 잇지만 내분으로 살해되고 다윗은 피 흘리지 않고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릅니다. 다윗은 민심을 추스르고자 새 도읍지를 물색합니다. 예루살렘은 방어와 지리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다윗은 요압을 시켜 여부스족을 물리치고 법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후 일어납니다. 나단 신탁으로 다윗의 스펙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최정상의 오직 한 사람입니다. 세상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잘못된 일은 이 때 벌어지는 법입니다. 충직한 장수의 아내를 취하고 최전선에 몰아넣어 살인을 교사합니다.
등산에서 정상은 행선지의 가장 높은 산마루입니다. 정상에 오르면 ‘다 왔다’며 환호성을 지르고 사진을 찍습니다. 지나온 수고와 땀에 대한 보상 심리입니다. 다윗은 정상에서 사진과 같은 기념품을 갖고 싶었을까? 보통 정상을 절정이라고 생각하지요. 다윗의 간음과 살인은 정상의 자리에서 저지른 범죄입니다. 죄는 자신에게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그의 욕망은 궁중의 복잡한 혈연구조를 만들었고 다윗을 옭죄는 무기가 됩니다. 암논이 다말을 욕보이자 압살롬은 암논을 죽입니다(삼하 13장). 나아가 아버지 다윗을 몰아내는 모반이 일어납니다.
신앙에 과연 정상이 있을까? 마라톤으로 치면 정상은 반환점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정상이란 절반의 성취일 뿐입니다. 아직 갈 길이 그만큼 남았다는 뜻이지요. 신앙의 길에 산행의 정상, 마라톤의 반환점이 없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똑같이 어제 걷던 길을 가야 합니다. 바울의 이차 선교여행이 막바지에 이릅니다. 안디옥, 갈라디아, 네압볼리, 아테네와 고린도까지 거침없이 진행됩니다(행 18:1). 생업을 위해 천막을 만들고 또한 복음을 전파합니다. 반대자들의 기소에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 결심 그대로 선교에 온 힘을 쏟습니다. 바울은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고 고백합니다(빌 3:12).
누구나 정상에 오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정상을 반환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산등성이에 올라 더 높은 곳을 꿈꿉니다. 예수는 표적에 집착하는 세대를 한탄합니다. 오천 명, 사천 명 급식사화를 보면서 더 큰 기적을 원하기 때문입니다(막 8:11). 표적이란 산마루처럼 눈에 띄는 성과를 말합니다. 다윗은 뛰어난 스펙 때문에 정상에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범죄는 정상에서 벌어진 범죄이자 오류입니다. 정상은 재능과 스펙을 과시하는 경연자리가 아닙니다. 정상이란 하산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 공간이며, 나를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하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그러니 정상에서 힘을 쓰거나 해찰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길에 정상이 없다는 것은 천만다행입니다. 百里行者半九十! 그리스도께 붙들린 우리는 구십 리에 와서 이제 목표의 절반에 왔다고 여기고 묵묵히 가야합니다. 믿음의 길을 순례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김창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