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는 이웃에게 해서는 안 될 ‘금지’를 말합니다. 복음서는 이웃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말합니다. 서신 역시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권고합니다. 금지가 계율이라면, 권고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선택은 행하지 않는다고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웃에게 악을 행하면 죄가 됩니다. 하지만 복음의 관점은 다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선을 행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웃에 대해 어떻게 했느냐가 마지막 날 심판의 기준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통상 말하는 ‘이웃’은 누구인가? 우리와 함께 아무 문제없이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를 일으키거나 내게 곤란한 처지인 사람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사상이 다른 사람들, 종교가 다른 사람들 등은 이웃으로 수렴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무관심, 차별, 배제, 증오의 기제가 작동됩니다. 그런 이들은 대개 곤경에 처할 때마다 외적이 아닌 자기 안의 ‘타인’을 공격합니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웃을 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분단 이후 지금까지 남과 북이 그래왔습니다. 분단 이후 전혀 변하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일본의 아베를 중심한 극우 세력과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정신적으로 일란성 쌍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본은 지배하고 한국은 복종하는 관계를 정상으로 여기는 이들입니다. 미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일본 아베의 한국에 대한 경제공격은 국가주의 혹은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퇴행적인 모습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이웃은 누가인가? 우리 가운데서 잊혀진 존재, 버려진 존재, 배제된 이들입니다. 물론 원수까지도 이웃으로 수렴하라는 것이 성서의 기본 정신입니다. 내가 타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타인인 내가 그들의 이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타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수렴됩니다. 그리하여 레위기는 “원수를 갚지 말라”(레 19:18)고 합니다. 바울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 12:20)고 합니다. 누가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라”(눅 6:35)고 합니다.
누가 ‘원수’인가? 바울에 의하면 “나를 핍박하는 자”입니다. “나를 미워하고 나를 적대할 뿐만 아니라 나로 하여금 악을 악으로 보복하도록 요구하는 자”입니다(바르트, [로마서 강해] p.725). 성서는 원수를 생래적인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원수는 ‘이웃’으로서가 아닌 절대적으로 잊혀진 ‘타자’가 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현상의 산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마땅히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할 사람들을 타자로 밀어냄으로써 우리 자신이 지금 잊혀진 사람들의 원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한국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원수가 많습니다.
우리는 ‘내’ 원수만을 생각했지 ‘내가’ 이웃으로 수렴하지 않은 이들의 원수가 되어 있음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합니다. 이런 뜻에서 원수는 나 밖에만 있지 않고 나 안에도 있습니다. 만일 내가 내 원수를 갚는다면 결국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 12:19)고 하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 마실 물을 주는 행위는 바로 내게 하는 일이요, 내가 구원받은 일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21).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는다]”는 말은 ‘그의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는 셈족의 격언이라고 합니다. 악인을 이기는 최상의 방식은 그들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 안에 들어와 있는 악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악에게 지지 맙시다. 선으로 악을 이깁시다. 아멘.
(하태영 목사)
레위기는 이웃에게 해서는 안 될 ‘금지’를 말합니다. 복음서는 이웃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말합니다. 서신 역시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권고합니다. 금지가 계율이라면, 권고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선택은 행하지 않는다고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웃에게 악을 행하면 죄가 됩니다. 하지만 복음의 관점은 다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선을 행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웃에 대해 어떻게 했느냐가 마지막 날 심판의 기준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통상 말하는 ‘이웃’은 누구인가? 우리와 함께 아무 문제없이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를 일으키거나 내게 곤란한 처지인 사람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사상이 다른 사람들, 종교가 다른 사람들 등은 이웃으로 수렴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무관심, 차별, 배제, 증오의 기제가 작동됩니다. 그런 이들은 대개 곤경에 처할 때마다 외적이 아닌 자기 안의 ‘타인’을 공격합니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웃을 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분단 이후 지금까지 남과 북이 그래왔습니다. 분단 이후 전혀 변하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일본의 아베를 중심한 극우 세력과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정신적으로 일란성 쌍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본은 지배하고 한국은 복종하는 관계를 정상으로 여기는 이들입니다. 미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일본 아베의 한국에 대한 경제공격은 국가주의 혹은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퇴행적인 모습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이웃은 누가인가? 우리 가운데서 잊혀진 존재, 버려진 존재, 배제된 이들입니다. 물론 원수까지도 이웃으로 수렴하라는 것이 성서의 기본 정신입니다. 내가 타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타인인 내가 그들의 이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타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수렴됩니다. 그리하여 레위기는 “원수를 갚지 말라”(레 19:18)고 합니다. 바울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 12:20)고 합니다. 누가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라”(눅 6:35)고 합니다.
누가 ‘원수’인가? 바울에 의하면 “나를 핍박하는 자”입니다. “나를 미워하고 나를 적대할 뿐만 아니라 나로 하여금 악을 악으로 보복하도록 요구하는 자”입니다(바르트, [로마서 강해] p.725). 성서는 원수를 생래적인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원수는 ‘이웃’으로서가 아닌 절대적으로 잊혀진 ‘타자’가 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현상의 산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마땅히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할 사람들을 타자로 밀어냄으로써 우리 자신이 지금 잊혀진 사람들의 원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한국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원수가 많습니다.
우리는 ‘내’ 원수만을 생각했지 ‘내가’ 이웃으로 수렴하지 않은 이들의 원수가 되어 있음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합니다. 이런 뜻에서 원수는 나 밖에만 있지 않고 나 안에도 있습니다. 만일 내가 내 원수를 갚는다면 결국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 12:19)고 하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 마실 물을 주는 행위는 바로 내게 하는 일이요, 내가 구원받은 일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21).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는다]”는 말은 ‘그의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는 셈족의 격언이라고 합니다. 악인을 이기는 최상의 방식은 그들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 안에 들어와 있는 악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악에게 지지 맙시다. 선으로 악을 이깁시다. 아멘.
(하태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