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 심판하실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으시는가? 마태가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놀랍게도 하찮은 일이지만,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물을 주고, 병든 이웃을 위로하고, 옥에 갇힌 이를 돕는 일 등 “지극히 작은 자”를 돕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라고 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이 “작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작은 자”를 돕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돕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물 한 잔’ 주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로 보면 하찮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 하찮은 일에는 우리가 대수롭게 여길 수 없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목마름, 굶주림, 감옥에 갇힘은 다름 아닌 인간이 인간을 경계하고, 원수로 여기고, 증오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 한 잔 마시라고 내미는 손은, 깨진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뜻이 담긴 것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소박한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구체성이 없는 추상적인 사랑은 하기 쉽습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고··· 하는 식이지만 실제로는 책임도 없고, 심판 기준도 없습니다. 당연한 일을 당연히 말하는 사람 치고 정말 그 일에 책임적인 경우가 드뭅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에게서 ‘아무런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자’입니다. 고맙다는 인사말조차 기대할 수 없는 자입니다. 다만 내가 받은 은총의 선물을 나누어 가지는 즐거움 혹은 의무로 도와야 할 자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닌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이 세상사람 누구나 지극히 작은 자일 수 있고, 또한 지극히 작을 자를 도와야 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나는 도움을 받아야 할 작은 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말할 것도 없고, 비록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도울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누가 가장 부유한 자인가? 자신이 받은 은총의 선물을 나누어 가지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법조문으로 사람을 심판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가 지닌 따뜻한 마음으로 심판합니다. 세상의 상찬은 업적으로 평가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흔적이 없는 은총의 결실로 심판합니다.
구약의 미가서는 메시야 왕국에 대한 종말론적인 희망의 말씀입니다. 지금 이들이 서 있는 자리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파괴되어 잡초만 무성하고, 백성들의 삶은 고단하고, 민심은 흉흉합니다. 이럴 때 예언자 미가는 가난한 농민을 착취하는 파렴치한 부자들을 향해서 “이스라엘집의 지도자들아, ···너희는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뼈를 산산조각 부수고 고기를 삶듯이 내 백성을 가마솥에 넣고 삶는다.”(미 3:1-3)라고 독설을 퍼붓습니다. 여기 “내 백성”은 힘없이 착취만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들]”입니다.
미가는 이처럼 작은 자들을 착취하는 부자들, 공직자들의 심판을 선포하면서, 동시 백성들을 향해서는 메시아 왕국의 도래라고 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현재의 고난을 하나님 신앙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희망과 하나님의 희망이 대결합니다. 인간의 희망은 가진 자들의 희망입니다. 종국에는 잡초만 무성할 희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희망은 “지극히 작은 자”의 희망입니다. 지금은 희미하지만 언젠가 찬란히 빛날 희망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목할 대목이 있습니다. 천사로부터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성도들은 너무나 감격해서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고 합니다(계 19:10). 그러자 천사는 극구 사양하면서 나도 똑 같이 주님을 섬기는 종일뿐이니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하나님만이 주권을 행사하는 나라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존중하는 나라라고 해서, 지극히 작은 자들이 권세를 누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종류의 인간도 하나님의 자리를 넘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의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극히 작은 자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나라입니다. (하태영 목사 / 설교자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 심판하실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으시는가? 마태가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놀랍게도 하찮은 일이지만,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물을 주고, 병든 이웃을 위로하고, 옥에 갇힌 이를 돕는 일 등 “지극히 작은 자”를 돕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라고 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이 “작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작은 자”를 돕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돕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물 한 잔’ 주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로 보면 하찮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 하찮은 일에는 우리가 대수롭게 여길 수 없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목마름, 굶주림, 감옥에 갇힘은 다름 아닌 인간이 인간을 경계하고, 원수로 여기고, 증오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 한 잔 마시라고 내미는 손은, 깨진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뜻이 담긴 것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소박한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구체성이 없는 추상적인 사랑은 하기 쉽습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고··· 하는 식이지만 실제로는 책임도 없고, 심판 기준도 없습니다. 당연한 일을 당연히 말하는 사람 치고 정말 그 일에 책임적인 경우가 드뭅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에게서 ‘아무런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자’입니다. 고맙다는 인사말조차 기대할 수 없는 자입니다. 다만 내가 받은 은총의 선물을 나누어 가지는 즐거움 혹은 의무로 도와야 할 자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닌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이 세상사람 누구나 지극히 작은 자일 수 있고, 또한 지극히 작을 자를 도와야 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나는 도움을 받아야 할 작은 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말할 것도 없고, 비록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도울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누가 가장 부유한 자인가? 자신이 받은 은총의 선물을 나누어 가지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법조문으로 사람을 심판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가 지닌 따뜻한 마음으로 심판합니다. 세상의 상찬은 업적으로 평가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흔적이 없는 은총의 결실로 심판합니다.
구약의 미가서는 메시야 왕국에 대한 종말론적인 희망의 말씀입니다. 지금 이들이 서 있는 자리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파괴되어 잡초만 무성하고, 백성들의 삶은 고단하고, 민심은 흉흉합니다. 이럴 때 예언자 미가는 가난한 농민을 착취하는 파렴치한 부자들을 향해서 “이스라엘집의 지도자들아, ···너희는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뼈를 산산조각 부수고 고기를 삶듯이 내 백성을 가마솥에 넣고 삶는다.”(미 3:1-3)라고 독설을 퍼붓습니다. 여기 “내 백성”은 힘없이 착취만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들]”입니다.
미가는 이처럼 작은 자들을 착취하는 부자들, 공직자들의 심판을 선포하면서, 동시 백성들을 향해서는 메시아 왕국의 도래라고 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현재의 고난을 하나님 신앙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희망과 하나님의 희망이 대결합니다. 인간의 희망은 가진 자들의 희망입니다. 종국에는 잡초만 무성할 희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희망은 “지극히 작은 자”의 희망입니다. 지금은 희미하지만 언젠가 찬란히 빛날 희망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목할 대목이 있습니다. 천사로부터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성도들은 너무나 감격해서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고 합니다(계 19:10). 그러자 천사는 극구 사양하면서 나도 똑 같이 주님을 섬기는 종일뿐이니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하나님만이 주권을 행사하는 나라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존중하는 나라라고 해서, 지극히 작은 자들이 권세를 누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종류의 인간도 하나님의 자리를 넘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의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극히 작은 자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나라입니다. (하태영 목사 / 설교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