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삶과 세례(겔 11:14-20; 롬 6:3-11; 요 3:1-8 / 15.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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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신비한 사건을 접한 이들은 점차 부활을 ‘죽은 다음의 부활’로만 생각하지 않고, 개개인의 삶에서 어떻게 부활의 삶이 이뤄져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의식의 변화와 함께 초대교회는 세례를 부활의 삶과 관련시켜서 이해하게 됩니다. 초대교회에서 세례는 표면적으로는 개종의 의미가 강했고,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거룩한 예식으로 여겼습니다. 육적인 몸의 죽음과 함께 새로운 영적인 몸을 얻는 예식으로 여긴 것입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자신의 궁극적인 문제를 알고 싶어 당시 지배층 사람들에게는 기피인물인 예수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가 밤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단한 용기를 지닌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니고데모에게서 배울게 있습니다. 풀리지 않는 실존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자신의 사회적인 명성이나 손실을 개의치 않는 자세야 말로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육적인 사람이 죽음으로서만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죽음을 통해 삶으로, 이게 부활의 공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죽지 않기 위해 삶의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삶은 살기 위해서 죽는 쪽으로 삶의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에스겔서에서 이런 도식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 포로로 끌려갔을 때, ‘남은 자들’은 포로로 끌려간 동족들을 마음 아파하기는커녕 오히려 고소해했습니다. 저들은 마치 죄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버린 것이고, 자기들은 무죄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남겨두신 것으로 여겼습니다. 에스겔은 이처럼 빗뚫어진 자들을 향해서 경고합니다. ‘너희가 남아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무죄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멀리 떠나게 하셨지만, 친히 그들과 동행하시며 그들이 거처하는 이방을 성소가 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다시 고향에 돌아오게 하시어 예루살렘을 그들의 소유가 되게 하실 것이다’고.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삼으려는 이들은 어쩌다 기회를 얻었다 해도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억울한 일 당한 이들을 배척하는 나라 역시 잘 될 수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은 세월호 참가 일어 난지 1년이 다 되도록 유가족들은 국가로부터 공적인 위로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잃은 이들을 향해 보상금을 내밀면서 ‘이제 그만 잊으라’며 모욕하는 나라입니다. 분단 70년이 되었음에도 분단을 이용해서 제 이익을 챙기는 이들이 활개 치는 나라입니다. 이를 보면 대한민국은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한 나라입니다. 정말 잘 사는 나라이고 싶다면 나라가 앞장서서 불행을 당한 이들을 감싸 안아야 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인간의 죄는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는 역사적이며 실제적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죄는 죽지 않으면 안 될 운명입니다. 죄가 죽지 않으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지 못합니다. 따라서 세례는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에 들어가서 질식하는 죽음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처럼 뒤틀린 심성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내 속에 든 자기 파멸적인 죄의 유전인자를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께서 물세례와 함께 성령 세례를 말씀하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내 힘만으로는 내 속에 든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태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