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궤와 십자가(삼하 6:12-19; 히 12:18-24; 막 11:1-10 / 16.3.20)

관리자
202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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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종려주일에 읽은 구약의 말씀은 북왕국 지역에 있던 법궤를 다윗이 있는 남왕국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서는 예수께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두 이야기에서 예루살렘은 다윗에게도, 예수에게도 중요했습니다. 또 참된 평화가 어떻게 이뤄지는 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습니다. 법궤의 예루살렘 입성은 다윗이 왕권의 정통성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낡은 세계를 해체시키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했음을 선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법궤의 예루살렘 입성은 잘 기획된 각본에 따라 장엄하고, 엄숙하고, 질서정연합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어설프고, 경쾌하고, 무질서한데다 장난스럽기까지 합니다. 법궤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가장 흥겨운 사람은 다윗입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흥겨운 사람들은 종려가지를 꺾어 흔든 백성들입니다. 법궤를 옮길 때 열광한 사람들은 대부분 동원된 사람들입니다. 무려 3만 명이나 동원됐습니다. 제물로 바친 수소와 암소만 해도 2천 마리가 넘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영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몰려든 사람들입니다. 물론 고위층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시골 사람들, 변두리 사람들, 어린 아이들, 가난한 사람들 일색입니다.

법궤가 무사히 다윗성에 안치된 후 다윗은 백성들에게 떡과 고기를 나눠주고 축복도 했습니다. 다윗이 스스로 제사장으로, 통치자로 행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 후 조용히 베다니로 물러가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 한 주간 동안 수많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데 성공한 다윗은 무소불위의 군주가 되어 그 뒤로 40년 동안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께서는 허망하게 십자가에 달려 처형됩니다. 다윗은 성공했고, 예수는 실패했습니다. 다윗의 평화는 피로 점철되었고, 예수의 평화는 인류의 희망으로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세상은 이 두 가지 열정이 있습니다. 법궤를 자기중심에 두려는 열정도 있고, 희미하기는 하지만 십자가를 향한 열정도 있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법궤를 자기중심에 두기 위해 피 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성공하면, 다윗처럼 백성들을 훈계하며, 역사까지도 변조시키는 일을 하려듭니다. 그 반대편에 예수께서 계십니다.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신 분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두 가지 이미지를 ‘시내산’과 ‘시온산’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시내산은 율법적인 세상의 정상을, 시온산은 복음적인 세상의 정상을 상징합니다. 시내산은 어둠, 두려움, 접근 불가능성을, 시온산은 하늘의 예루살렘을, 완성된 교회를, 구원받은 누구에게나 개방된 나라를 상징합니다. ‘아벨의 피’와 ‘예수의 피’를 대조하기도 합니다. 아벨의 피는 살해당한 자의 피, 원한을 지닌 피, 복수 피입니다. 예수의 피는 속죄의 피, 화해의 피, 사랑의 피 입니다. 예수의 피는 아벨의 억울한 피로 인한 복수의 악순환을 단절하고, 사랑과 화해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 흘린 피 입니다. 아벨의 피와 예수의 피는 결코 섞일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아벨의 피가 들끓는 세상의 자리에서 돌이켜 예수의 피로 가꾸는 자리(교회)에 들어온 이들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이 앉아야 할 자리는 권세의 자리도 아니고, 부자들이 모인 자리도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새 예루살렘입니다. 시온산입니다. 새롭게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새로운 세상의 중심부에는 예수께서 계십니다. 다윗에게 필요한 것은 법궤입니다. 예수에게 필요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하태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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