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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전통에 의하면, 갖가지 종류의 제사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행해지는 대속죄제는 대제사장 혼자서 지성소에 들어가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때 대제사장은 먼저 몸을 깨끗이 씻고, 평소에 입던 제사장 법복을 벗은 다음, 세마포 속옷만 입고, 띠를 띠고, 관을 썼습니다. 다음으로 대제사장은 자신을 위하여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게 되는데, 염소 두 마리를 취하여 회막에서 제비를 뽑아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한 희생 제물로 삼았습니다. 대제사장은 속죄 제사를 마친 다음, 아사셀로 선별한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안수기도를 마친 염소를 광야로 끌고 가서 내버립니다. 이렇게 버려진 아사셀 염소는 광야에서 떠돌다가 맹수들에 의해 찢김을 당하고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사셀 염소의 희생은 거룩한 희생인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구약의 속죄 전통을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아사셀 양의 희생으로 본 것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여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시어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단번에 온전한 장막인 성소에 들어가신 것”(히 9:11-12)이라고 예수님 자신을 대제사장으로 확대해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계약’ 관계입니다. 계약에는 반드시 계약을 보증하는 증표가 있어야 했고, 증표는 피로써 보증했습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라는 개념이 확립됩니다. 하지만 이 대속의 피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활용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대제사장 가야바입니다. 그는 산헤드린에서 연설하기를,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요 11:50)라고 합니다. 소위 백성의 최고 종교지도자라는 사람이 나라는 구한다는 명목으로 살인을 교사한 것입니다. 가야바의 위선적인 말을 더 들어봅시다.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47). 그럼에도 저가 진리를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세계 만민을 위해서 희생되어 새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의 피를 내 이익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야바처럼 다른 사람을 제물로 삼아서는 안 되지만, 가야바와 같은 사람들에게 동조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은 사악한 일을 하면서도 민족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선동하고, 가치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변함없이 권력쟁취와 이익을 위해서 누군가를 희생 제물로 삼는 야만적인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래도 구약시대에는 양으로 속죄의 제물을 삼았는데, 소위 문명세계에서 더 고약한 일을 합니다. 짐승이 아닌 주로 힘없는 사람을 제물로 삼는 것입니다. 국가정보원이 죄 없는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외교문서까지 조작한 일이 있지요. 기업이 저임금 구조를 만들어 이윤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기업과 결탁한 권력은 열심히 노동력 착취를 합법화하는 법을 만듭니다. 그래야 나라가 산다고 다그칩니다. 남미에서 농민들이 하루 종일 커피 열매를 따고 받는 임금은, 우리가 마시는 커피 한 잔 값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정말 살기 좋은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애국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입니다. 애국을 강조하는 나라치고 좋은 나라 없습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한다’고 했을 때, 그 진실 됨은 ‘타자희생’이 아닌 ‘자기희생’에 있음을 말해주는 게 바로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하태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