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를 옮겨서 치유하시다(사 42:18-25; 롬 10:9-15; 막 7:31-37 / 16.8.7)
한국기독교장로회 삼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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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시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나라가 도둑(바빌론)에게 탈취 당하고, 연약한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사리사욕과 안일만을 탐했습니다. 이사야는 이런 자들을 향해서 귀머거리요 소경이라고 질타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너를 보배롭게 여기신다”(사 43:4)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짐승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존감을 지니고 살라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당연히 진실을 외면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불의를 외면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복음서의 치유 이야기는, 그 시대의 모순을 안고 살아가는 한 귀머거리를 예수께서 어떻게 고치시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방지역, 이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저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지역을 다니시면서 활동하셨습니다. 경계지역(국경지역)은 사람과 재화의 교류가 활발한 곳이기도 하지만, 강자들끼리 정치적 타협의 희생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합니다. 물론 경계지역은 국경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곳 어디든지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경계지역의 귀머거리에 어눌한 자’란 참으로 묘한 설정입니다. 경계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귀가 밝아야 합니다. 어눌해서는 안 됩니다. 거래를 하려 해도 그러하고, 도피를 하려 해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귀머거리에 어눌하기까지 하다니, 도무지 경계지역에서 생존할 수 없는 부적격자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고치기 위해 “따로 데리고 떠나”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그들은 당장 생존에 필요한 소리(정보)에만 즉물적으로 반응하지, 참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귀머거리기 위해 ‘그들의 말’이 지배하는 ‘자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지배하는 ‘자리’로 데리고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리’가 중요합니다. 그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원한다면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합니다. *가수 한대수씨가 늦둥이 딸의 행복을 위해 한국을 떠나 뉴욕으로 간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도 역시 딸의 행복을 위해서는 사는 자리를 옮기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손에 침을 뱉어 귀머거리의 혀를 만지는 행위를 일종의 치유행위로 보기도 합니다만, 그보다는 귀머거리의 망가진 영혼을 깨우려 자극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막 7:34-35) “에바다”는 ‘열려라’는 뜻도 있지만, ‘해석하라’ ‘설명하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귀머거리를 단지 소리만 듣게 하신 게 아닙니다. 깨어 있는 영혼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을 해석하는 능력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한 독립된 인간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롬 10:8)이 어떻게 내 믿음이 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이 자신에게로 향한 의지라면,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타자를 향한 의지일 것입니다. 믿음은 마음으로 믿는 의지와 입으로 시인하는 의지를 지님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내 삶의 기억이 되고, 내 삶의 역사가 되고,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됩니다. 현실은 어떠합니까? 마음으로는 믿으나 입으로는 시인하지 못합니다. 입으로는 시인하지만 마음으로는 믿지 못합니다. 결국은 이사야시대 사람들처럼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맹인이요 소경으로 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런 이들을 향해 이사야가 내린 처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보배롭게 여기신다”(사 43:4)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자존감을 지니고 살라는 분부입니다.
(하태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