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라는 저술로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한병철 박사가 이번에 [아름다움의 구원]이라는 저술을 냈습니다. 이분에 의하면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균형 잡히고, 조화롭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것. 현실의 부정성에서 벗어난 긍정적인 것입니다. 일체의 부정성이 제거된 채 매끄럽게 다듬어져 나에게 만족을 주는 대상, 향유의 대상, 즉 소비의 대상으로 축소된 아름다움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아름다움은 나의 자기긍정에만 기여할 뿐, 나를 진정 뒤흔들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것이 되었습니다. 한병철이 생각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나를 타격하여 쓰러뜨리는 것’ ‘나를 뒤흔들고 파헤치고, 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은총’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 무엇입니다. 찌르고 상처 내는 것들을 제거한 것이지요. ‘말씀이 은혜롭다’ 라거나, ‘은혜로운 말씀’이라는 표현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은혜로운 말씀이라면 당연히 즐겁고, 기쁘고, 감사하고, 나를 긍정하여 감격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총은 그렇게 매끄러운 게 아닙니다. 은총은 하나님의 현존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은 나를 부정하고, 세상을 부정하게 합니다. 나를 찌르고,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합니다. 세상을 긍정하고, 나를 긍정만하는 것이라면 그게 바로 바알의 설교입니다.
예언자들이 “야훼의 날”을 ‘은혜의 날임’과 동시에 ‘심판의 날’과 동일시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스바냐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습 1:13)입니다. 하지만 스바냐의 심판 예언의 바탕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끈끈하게 녹아 있습니다. 비록 심판은 불가피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굳건히 지켜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서신 역시 종말의 날은 심판의 날임과 동시에 ‘은총의 시간’이며 ‘기회의 시간’으로 말합니다. 베드로서신에서 종말의 날은 모든 것의 체질이 ‘풀어지는’(벧후 3:11) 날입니다. 그 시대가 선으로 여긴 가치관, 풍조, 철학 체계, 인간이 쌓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해체되고’ 그러함으로써 새롭게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약속이 주어집니다. “(너희는) 그의 약속을 믿고, 의의 거하는 바(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겠느냐고, 그 때를 알고 싶어 할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자기 삶을 안전하게 보증했던 것들은 아무 소용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나를 긍정하고 싶은 욕망을 거부합니다. 인간의 자기 업적을 자랑하고 싶은 욕망 역시 거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나를 찌르고, 흔들어서, 돌아서게 합니다.
한국교회 역사상 오늘날처럼 강단의 설교가 풍성한 때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 말씀이 세련되고 풍성하여 들을 게 많습니다. 설교자들의 말씀을 증언하는 기술도 연기자들 못지않게 탁월합니다. 설교자들의 학력도 높습니다. 그런 이들에 의해 이뤄지는 설교들은 나를 긍정하게 하고, 나를 수용해주고, 나를 감격시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그 풍성하고 세련된 말씀들이 듣는 이들을 불편하지 않도록 모서리를 매끄럽게 다듬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듣는 이들을 찌르고, 괴롭게 하고, 부정하지 않습니다. 나를 타격하고, 뒤흔들고, 파헤치고, 의문을 제기하고,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경고하는 설교가 아닌 것입니다. 알고 보면 말씀을 소비하는 것이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설교가 아닌 것입니다.
(하태영 목사)
[피로사회]라는 저술로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한병철 박사가 이번에 [아름다움의 구원]이라는 저술을 냈습니다. 이분에 의하면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균형 잡히고, 조화롭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것. 현실의 부정성에서 벗어난 긍정적인 것입니다. 일체의 부정성이 제거된 채 매끄럽게 다듬어져 나에게 만족을 주는 대상, 향유의 대상, 즉 소비의 대상으로 축소된 아름다움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아름다움은 나의 자기긍정에만 기여할 뿐, 나를 진정 뒤흔들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것이 되었습니다. 한병철이 생각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나를 타격하여 쓰러뜨리는 것’ ‘나를 뒤흔들고 파헤치고, 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은총’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 무엇입니다. 찌르고 상처 내는 것들을 제거한 것이지요. ‘말씀이 은혜롭다’ 라거나, ‘은혜로운 말씀’이라는 표현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은혜로운 말씀이라면 당연히 즐겁고, 기쁘고, 감사하고, 나를 긍정하여 감격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총은 그렇게 매끄러운 게 아닙니다. 은총은 하나님의 현존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은 나를 부정하고, 세상을 부정하게 합니다. 나를 찌르고,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합니다. 세상을 긍정하고, 나를 긍정만하는 것이라면 그게 바로 바알의 설교입니다.
예언자들이 “야훼의 날”을 ‘은혜의 날임’과 동시에 ‘심판의 날’과 동일시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스바냐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습 1:13)입니다. 하지만 스바냐의 심판 예언의 바탕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끈끈하게 녹아 있습니다. 비록 심판은 불가피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굳건히 지켜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서신 역시 종말의 날은 심판의 날임과 동시에 ‘은총의 시간’이며 ‘기회의 시간’으로 말합니다. 베드로서신에서 종말의 날은 모든 것의 체질이 ‘풀어지는’(벧후 3:11) 날입니다. 그 시대가 선으로 여긴 가치관, 풍조, 철학 체계, 인간이 쌓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해체되고’ 그러함으로써 새롭게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약속이 주어집니다. “(너희는) 그의 약속을 믿고, 의의 거하는 바(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겠느냐고, 그 때를 알고 싶어 할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자기 삶을 안전하게 보증했던 것들은 아무 소용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나를 긍정하고 싶은 욕망을 거부합니다. 인간의 자기 업적을 자랑하고 싶은 욕망 역시 거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나를 찌르고, 흔들어서, 돌아서게 합니다.
한국교회 역사상 오늘날처럼 강단의 설교가 풍성한 때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 말씀이 세련되고 풍성하여 들을 게 많습니다. 설교자들의 말씀을 증언하는 기술도 연기자들 못지않게 탁월합니다. 설교자들의 학력도 높습니다. 그런 이들에 의해 이뤄지는 설교들은 나를 긍정하게 하고, 나를 수용해주고, 나를 감격시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그 풍성하고 세련된 말씀들이 듣는 이들을 불편하지 않도록 모서리를 매끄럽게 다듬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듣는 이들을 찌르고, 괴롭게 하고, 부정하지 않습니다. 나를 타격하고, 뒤흔들고, 파헤치고, 의문을 제기하고,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경고하는 설교가 아닌 것입니다. 알고 보면 말씀을 소비하는 것이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설교가 아닌 것입니다.
(하태영 목사)